일상 속으로
결혼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결혼식의 하얀 드레스와 반지,
신혼여행은 사실 놀라운 역사적 변화의 산물이다.
인류 최초의 결혼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었다.
같은 동굴,
같은 씨족 안에서 이루어진 근친혼이 자연스러운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경과 유목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피가 가까울수록 자손에게 드리워지는 유전적 그림자가 짙어진다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냉정한 현실이다.
이러한 계산 아래 근친혼은 금기가 되었고,
시선은 씨족의 경계 밖으로 향했다.
그래서 이어진 것이 '약탈혼(납치혼)'이었다.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이웃 씨족의 여성을 빼앗던 그 폭력적 순간들이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다.
신부를 감쌌던 납치용 그물이 하얀 면사포로,
발목을 묶던 족쇄가 반짝이는 결혼반지로,
납치를 돕던 친구들이 들러리로 변모한 것이다.
심지어 신랑이 신부의 오른쪽에 서는 관습조차 칼을 휘두를
오른손을 자유롭게 하려던 전략의 흔적이라는 설이 있다.
유목민이나 에스키모인들에겐 과객혼도 존재하였는데,
이는 손님에게 자신의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이다.
기혼 여성이 낯선 손님 또는 다른 부족의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다양한 유전자를 확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혼 여성이 다른 남자에게서 임신하면
씨족사회가 모두 축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에는 보쌈이란 형태의 약탈혼이 있었으나,
이는 유교문화로 엄격히 금지된 재혼을 할 수 있는 일종에 짜고 치는 고스톱 형태였다.
남녀 양측이 사전에 서로 입을 맞춰 높고 보쌈을 해가는 형태였다.
그래야 엄청난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은 위험했기에 점차 '문명화된' 거래인 매매혼으로 발전했다.
지참금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의 몸값이 오가던 시대,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자 가문의 재산으로 여겨졌다.
결혼 후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은 이러한 소유권의 상징이었다.
서양의 '패밀리(family)'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하인을 뜻하는 'familia'에서 유래된 것처럼,
가족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이름 아래 구축된 체계였고,
여성은 그 체계에 '속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고구려의 서옥제에서 볼 수 있듯이,
신랑이 신부의 집에 지어진 사위집에서 살며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장인 집에 머물렀다.
'장가든다'는 말이 바로 이 풍습의 흔적이다.
이는 여성의 가문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회,
즉 모계적 성격이 강했던 우리 문화의 증거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제사에 참여하며,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상속을 받았다.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 것은 여성과 그 가문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납치당하고 매매되어야 했던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과
비교할 때 상당한 수준의 권리였다.
하지만 결혼의 역사는 유연함의 역사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여성 교육의 확산,
경제적 독립은 전통적인 결혼 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소유의 개념은 점차 사랑과 동반자 관계로 대체되고 있으며,
'패밀리'의 정의도 동성 커플, 비혼 가구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미래의 결혼은 어떤 모습일까?
동거, 계약 결혼, 평생 연애, 심지어 인공지능과의 동반자 관계까지 논의되는 시대이다.
약탈의 그늘과 매매의 화폐가 남긴 상흔은 여전히 우리 문화 남아 있지만,
그 낡은 틀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결혼은 점점 더 제도적 강제가 아닌 개인의 선택적 유대 관계로 재정의되고 있다.
핵심은 어떤 형태를 선택하든,
그것이 진정한 동의와 평등, 상호 존중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씨족의 경계를 넘어 여성을 끌어안던
그 순간부터 결혼은 끊임없이 변해왔다.
폭력과 소유의 역사를 딛고,
지금 우리는 결혼의 본질을 다시 묻는 전환점에 서 있다.
미래의 결혼이 과거의 그물망에 완전히 걸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서로를 '가족'이라 부르고 싶은 근본적 욕망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그 답은 여전히 우리의 선택과 실천 속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