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응시하는 자아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한국 최초)을 처음 마주하는 이의 마음은 복잡하다.

정면을 꿰뚫어보는 그의 강렬한 눈빛에 압도되면서도,

어디선가 낯선 위화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코털 하나하나,

불꽃처럼 꿈틀대는 풍성한 수염의 생생함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정작 그 얼굴은 허공에 떠 있는 듯 고립되어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귀와 목, 몸통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초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파란이다.


20250905_145131.jpg 국보 제240호, 윤두서의 자화상, 1710


18세기 조선의 사대부에게 초상화란 단순한 초상이 아니었다.

사진이 없던 시대,

그것은 조상의 모습을 기억하고 사당에 봉안할 유일한 매개체였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인 명문가의 자손,

공재 윤두서라면 그 누구보다 전통적인 규범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당시 일반적인 초상화는 친구 심득경을 그린 그의 다른 작품처럼

단정한 전신상이나 반신상이었다.


20250905_145543.jpg 보물 1488호, 윤두서, 심득경 초상,1710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생략한다는 것은

유교적 윤리와 미의식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였다.

그가 이 같은 파격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비밀은 그림 속에가 아니라 그림의 ‘뒤’에 숨어 있었다.

1937년 촬영된 사진에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단정한 옷깃과

윤곽선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라진 것일까.

정밀 분석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사료집진속》 모습, 현재의 자화상, 적외선 촬영 모습- 왼쪽부터


그는 전통적인 이면 채색 기법을 활용해 옷과 몸체의 선을 종이 뒷면에 그렸다.

앞면에서는 수염의 섬세한 먹선과 얼굴의 채색에,

뒷면에서는 옷의 형태와 채색에 집중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아마도 그는 완성 직전,

앞면의 날카로운 수염과 뒷면의 옷선이 충돌하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단했다. 수염이 만들어내는 생동감과 에너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화가는 앞면의 옷선 초안을 지우고, 수염의 표현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렇게 ‘잘린’ 초상화는 완성되었다.

이는 실패가 아닌, 예술가의 의지가 만들어낸 의도적 생략이었다.

그의 위대함은 그 생략법에 있었다.


20250905_150707.jpg


그가 사실성을 벗어나까지 수염을 과장해 그린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0.5mm가 채 되지 않는 가는 붓놀림으로 일일이 묘사한 그 수염은,

단순한 모발의 재현이 아니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구레나룻과 아래로 흘러내리는

두 갈래 수염은 권위의 상징을 넘어,

그 내면에 꿈틀대는 기개와 의지를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사람들은 이 자화상을 보고 “검객의 기상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는 사실적인 재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정신을 붓끝에 가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응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물의 정면상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입체감을 살리기 어려웃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다양한 각도에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었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작품은 찾기 어렵다.


(30대)렘브란트 자화상, 1640


윤두서가 노구당에 보관한 백동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 작품을 그렸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것은 마치 자신과의 대결이었다.


그의 정면 응시는 당시 그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극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셋째 형은 조정을 비판하다 국문 끝에 죽었고,

절친한 친구마저 희생되었다.

머리와 수염이 반백이 되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그의 30대는 혹독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관모를 쓸 머리 윗부분을 잘라낸 것은 고위 관료가 되는

기존의 선비의 길을 포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윤두서의 <나물캐기[採艾圖]>


그러나 그는 도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과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천문학, 기하학,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탐구심은 조선의 현실을 넘어 세계와 우주를 향했다.

그의 풍속화에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던 서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겼다.

그는 그들을 위해 간척지를 만들고,

뒤주를 열어 배고픈 이들을 도왔으며, 노비도 한 인간으로 존중하라 가르쳤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단순한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지키고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한 지식인의 치열한 다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그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라고.


미확인 868509 (2).jpg 윤두서 作 ‘짚신삼기’


https://youtu.be/OA4xWoZ6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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