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증언자, 시대의 어머니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Self Portrait, 1923.jpg Self Portrait, 1923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그녀는 붓 대신 조각도를 택했고,

색채 대신 흑백의 세계를 선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가 화려한 궁정 미술이 아닌

거친 판화의 길을 걸은 이유는 간단했다.

예술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의사인 남편과 함께 베를린 빈민가에 정착한 콜비츠는 매일 고통과 마주했다.

병원을 찾는 노동자들의 상처받은 몸,

가난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절망적인 표정,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오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작품에 담아냈다.


1.jpg Käthe Kollwitz, 직조공의 행진(March of the Weavers), 1897


<농민전쟁>, <직조공의 행진> 같은 연작을 통해 억압받는 민중의 투쟁을 그려냈다.

그러나 진정한 고통은 개인적 차원에서 찾아왔다.

1차 대전에서 아들 페터를 잃은 후,

그녀의 작품은 더욱 깊은 비극성을 띠게 된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에서 보이는 모성의 절규는 단순히 개인의

아픔을 넘어 전쟁이 남긴 상흔을 온몸으로 받아안는 어머니들의 보편적 슬픔이었다.


666.jpg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1903)


The_Mothers,_1922.jpg 전쟁 / 어머니들, 1922


콜비츠는 유화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판화가 대량 복제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예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철학이 매체 선택에까지 반영된 것이다.


흑과 백만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작품들은 오히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Death,_189397.jpg 직조공 봉기 / 죽음


나치가 집권한 후, 그녀의 작품은 '퇴폐 미술'로 낙인찍혔다.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전시도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연작을 통해 파시즘의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고발했다.

히틀러가 그녀에게 상을 주기를 거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권력자들에게 그녀의 예술은 너무도 불편한 진실이었으니까.


1945년 4월, 2차 대전이 끝나기 16일 전, 콜비츠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작품들은 여전히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녀의 유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은 아름다움보다 진실을,

장식보다 증언을 택했다.

그녀는 평생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안았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 앞에 선 우리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보다는 침묵하게 되고,

성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콜비츠가 꿈꾸었던 예술의 힘일 것이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솟구쳐 나오는 힘이었다.

나는 이 시대에 변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싶었다.”


미확인 128910 (2).jpg 날을 세우며


https://youtu.be/v-GgVrQxc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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