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의 막장드라마 PD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넷플릭스도 없던 시절,

영국 사람들은 무엇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을까?

답은 의외로 그림이었다.

정확히는 윌리엄 호가스(1697 - 1764)의 연작 판화였다.

이 남자는 18세기 영국에서 지금의 막장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이고 리얼한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미술 저작권법’을 만든 화가이다.


호가스의 첫 히트작 「어느 창녀의 일대기」를 보면,

현대 웹툰 못지않은 스토리텔링에 감탄하게 된다.

순진한 시골 처녀 몰이 런던에 와서 고리대금업자의 정부가 되고,

매춘부로 전락해 감옥에 갇히다가 결국 매독으로 23세에 요절하는 이야기다.


1732_HarlotsProgress_1_b.jpg 어느 창녀의 일대기, 1 화, 1732/시골에서 막 상경한 처녀, 포주에 낚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례식 장면에서는 조문객들이 관 뚜껑 위에 술을 올려놓고 마시며,

성직자는 옆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장례사는 소매치기를 당한다.

이 와중에 몰의 아이는 여전히 혼자 방치되어 있다.

이쯤 되면 "이것이 진짜 막장이다" 싶다.


1732_HarlotsProgress_6_b.jpg 어느 창녀의 일대기, 6 화, 판화, 1732


더 놀라운 건 이 작품이 당시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이다.

숙련 노동자가 열흘 일해야 살 수 있는 비싼 가격임에도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했다.

호가스는 현대의 구독 시스템을 이미 300년 전에 도입했다.

한 점씩 배달해서 기대감을 높이는 마케팅까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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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작품 「난봉꾼의 일대기」는 더욱 스펙타클하다.

부자 아버지를 둔 톰이 유산을 물려받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가 파산하고,

정략결혼을 했다가도 도박으로 모든 걸 잃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주인공은 톰이 아니라 그의 옛 연인 사라 영이다.

톰이 자신을 버렸는데도 끝까지 그를 지키려 하고,

마지막엔 정신병원에서 벌거벗은 채 바닥에 누운 톰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 장면은 마치 피에타 같다고 평가받는다.


SE-2c6329f1-64ca-4751-8901-bb48d0b359e6.jpg 부유한 상인과 공작 가문의 정략적 결혼


세 번째 연작 「결혼 풍속도」는 10년간 준비한 역작이다.

몰락한 귀족과 신흥 부자가 정략결혼을 시키는데,

신랑신부는 결혼에 관심도 없고 각자 불륜을 저지른다.

결국 남편은 아내의 불륜 현장에서 칼에 맞아 죽고,

아내는 불륜 상대가 처형당하자 자살한다.

남겨진 아이는 유전으로 성병까지 앓고 있다.

이 정도면 현대 막장드라마도 울고 갈 수준이다.


3.jpg 벽에 걸린 <메두사의 머리>는이 결혼이 죽음으로 끝난다는암시이다.


DSC05380.jpg 시리즈의 마지막 그림은 자살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호가스의 진짜 매력은 이런 자극적인 스토리 속에 숨겨진 세밀한 상징들이다.

깨진 그릇으로 불운한 미래를 암시하고,

가면으로 위선을 표현하고,

하인이 기지개 켜는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현대 영화 못지않은 연출력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호가스의 유머 감각이다.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한 평론가 찰스 처칠에게 앙갚음할 때도

그냥 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애완견이 처칠의 책에 오줌 싸는 그림을 그렸다.

이런 센스라니!


호가스의 작품이 인기를 끈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상류층의 음란한 뒷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폭로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가 스캔들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호가스의 그림을 통해 평소 궁금했던 상류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3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떨까?

SNS와 유튜브로 넘쳐나는 시대지만,

정작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콘텐츠는 드물다.

호가스처럼 재치 있는 유머로 현실을 비판하는 여유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그의 작품을 보며 든 생각이다.

진짜 건강한 사회는 자신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jpg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
01.38358334.1.jpg 새우 파는 소녀(1740년대). 호가스는 판화 뿐 아니라 일반 회화에도 능했다


https://youtu.be/kaDsNhVS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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