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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색칠한 화가, 살보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이탈리아 출신 회화 작가 살보(SALVO, Salvatore Mangione, 1947~2015)

그림 앞에 서면 시간이 멈춘 듯하다.

아니, 시간이 색채로 변해 캔버스 위에 응고된 느낌이다.

살보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가을', '4월'처럼 간결한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화폭은 시간 그 자체를 담아내려는 시도다.

되풀이되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도 각 순간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을 포착해내는 예리한 시선이 돋보인다.


20250925_134838.jpg 살보 'Aprile', 2000


'어느 저녁'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수많은 저녁 중 하나를 마주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저녁은 다른 어떤 저녁과도

다른 독특한 순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늘의 색조 변화, 건물에 내리깔리는 그림자의 길이, 공기 중에 서린 습기까지

모두가 이 순간만의 특별함을 증명한다.


Una sera(70x50cm Oil on Canvas 1998).jpg 어느 저녁 Una sera, 1998


살보는 빛과 시간의 흐름에 깊이 몰두하며 색채를 극한까지 자유롭게 풀어냈다.

그의 강렬한 열망은 단순한 미적 쾌감을 넘어 시대를 아우르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

살보의 예술적 여정은 흥미로운 전환을 겪는다.

1960년대 후반, 그는 아르테포베라 운동에 참여하며

기성 규범에 저항하는 개념미술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1973년, 그는 예상치 못하게 "회화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개념미술이 주류로 자리 잡던 시기에 이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 전환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 라파엘의 자화상에 매료되었던 순수한 열정과,

1973년 피카소의 죽음이라는 예술사적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그만! 라파엘을 계승해야 할 때!"라는 외침에서 느껴지듯,

살보는 근본적으로 회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회적 흐름에 편승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그는

피카소의 죽음을 계기로 회화의 본질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살보, 라 발레 (2006.jpg 살보, 라 발레, 2006


1980년대에 이르러 살보의 독특한 화풍은 완성도를 더해간다.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색감은 마치 시간이 색으로 변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계절별, 시간대별 자연광을 밝고 채도가 높은 색으로 표현하며

생동감 넘치면서도 초현실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고전 건축물과 기둥, 도시의 네온 사인,

교외의 풍경까지 그의 작품 속 모티프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빛과 시간에 대한 탐구가 자리하고 있다.


살보의 그림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성찰이다.

그의 화폭에 새겨진 시간은 과거의 기억이자 현재의 경험,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동시에 내포한다.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한 울림은 아마도

우리 자신의 삶에 스민 수많은 순간들이 색채로 응축된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살보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시간을 색으로 만져보게 하고,

느껴지지 않는 기억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마법사다.


33.jpg 살보의 영향을 받은 니콜라스 파티의 작품 ‘Spring Landscape’(2024)



https://youtu.be/F2d_vv2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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