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어둑한 램프 빛 아래,
다섯 손이 하나의 접시를 향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가난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화가의 용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친 붓질로 표현된 농부들의 얼굴은 땅과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처럼 투박하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오직 감자뿐이다.
감자는 안데스 산지를 떠나 유럽에 도착한 이후 줄곧 빈민의 음식이었다.
식량 부족을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작물이자,
동시에 가난한 이들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19세기 네덜란드 농촌에서 감자는 주요 작물이었고,
저녁식사를 단순한 감자 요리로 대신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취사도구나 부재료조차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단지 삶아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조리법 덕분에,
감자는 고된 일과를 견뎌내는 노동자들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고흐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가난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어두운 화면 속에서도 가족이 함께 모여 앉아 하루의 수확을 나누는 순간,
그 안에는 존엄이 있다.
거친 손으로 땅을 파고 감자를 캐낸 그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
고흐는 그것이야말로 정직한 노동의 증거라고 믿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1849)은 사실주의 미술의 선언문과도 같은 작품이다.
한 노인과 한 젊은이가 길가에서 돌을 깨고 있다.
낡은 옷, 구부러진 등, 반복되는 망치질. 이것이 당시 노동 계층의 현실이었다.
쿠르베는 이상화된 풍경이나 영웅적인 역사화 대신, 눈앞의 진실을 그렸다.
돌을 깨는 일은 가장 힘들고 보수가 적은 일 중 하나였다.
노인의 뒤를 이어 젊은이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난의 대물림을 암시한다.
희망도 미래도 없이, 오직 생존을 위해 돌을 깨는
그들의 모습은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한다.
카를 슈피츠웨크의 《가난한 시인》은 가난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작고 초라한 다락방, 비가 새는 천장, 낡은 이불 속에서 시인은 우산을 쓰고 원고를 쓴다.
이 그림은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풍요의 대비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난로도 없는 방에서, 얇은 담요 하나에 의지해,
그럼에도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은 예술의 본질을 질문한다.
예술은 배를 채워주지 못하지만, 영혼을 살찌운다.
가난은 육체를 얽매지만, 창조의 열망은 자유롭다.
슈피츠웨크는 가난한 예술가를 동정의 대상이 아닌,
존경받아야 할 가치의 수호자로 그려냈다.
오노레 도미에의 《3등 객차》는 기차라는 근대 문명의 상징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좁은 좌석에 다닥다닥 붙어앉은 사람들, 지친 얼굴, 무표정한 시선.
1등 객차의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3등 객차는 가난한 이들만의 공간이다.
도미에는 석판화가이자 풍자 만화가로서 평생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민중을 향했고, 그들의 고단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다.
《3등 객차》 속 사람들은 서로 말도 없이, 각자의 피로 속에 잠겨 있다.
근대화가 약속한 진보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토마스 벤자민 케닝턴의 《홈리스》(1880-1916)는 산업혁명기 빈곤의 가장 잔인한 얼굴을 드러낸다.
젖은 길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안고 절망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한 장의 그림 이상이다.
그것은 고발이며, 절규이며, 당대 사회의 냉혹함에 대한 증언이다.
산업화는 부를 창출했지만, 그 부는 소수에게만 흘러갔다.
공장과 도시가 생겨나는 동안,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도시 빈민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케닝턴의 그림 속 어머니와 아이는 바로 그 사회적 방임의 희생자들이다.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의 이면에는 이러한 어둠이 존재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1857)과 《만종》(1857-1859)도 빼놓을 수 없다.
밀레는 농민 출신 화가로서 평생 농촌의 삶을 그렸다.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 세 여인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수확이었다.
허리를 굽힌 채 땅바닥을 뒤지는 그들의 모습은 비참해 보이지만,
밀레는 그들에게 존엄을 부여한다.
황금빛 들판, 넓은 하늘,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여인들.
가난은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자신의 몫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만종》에서는 저녁 기도를 올리는 농부 부부가 등장한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멀리 들리는 교회 종소리에 맞춰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은 가난 속에서도 지켜지는 신앙과 경건함을 보여준다.
가난을 그린 화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모두 외면받는 자들을 보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고흐는 농부들과 함께 식사하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했고,
쿠르베는 길가의 노동자를 화폭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도미에는 3등 객차에 앉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존엄을 부여했고,
케닝턴은 거리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았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만을 그리지 않는다.
때로는 추한 것, 불편한 것, 고통스러운 것을 그린다. 가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 시대의 현실을 고발하거나 사람들의 고통을 표현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는 연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
고흐가 램프 빛 아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렸을 때,
그는 단순히 가난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화가의 붓은 카메라처럼 객관적이지 않다.
그 안에는 화가의 마음이, 그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담긴다.
우리가 이 그림들을 보며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화가들이 의도한 것이다.
가난은 박물관에 걸린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감자 하나로 하루를 버티고,
돌을 깨며, 좁은 객차에 몸을 구겨넣고, 젖은 길바닥에서 아이를 안고 운다.
예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리고 다르게 본다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다.
화폭에 담긴 가난의 초상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