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어제 다녀온 지인의 장례식장은 유난히 조용했다.
예전 같았으면 입구를 가득 메웠을 화환들도,
조의금을 내려고 늘어선 긴 줄도,
한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고
다른 한쪽에서 고스톱 치는 소리도 없었다.
내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스산한 정적만이 흘렀다.
그러나 빈소에 들어서자 그 적막이 오히려 고인을 향한 진심 어린 추모로 느껴졌다.
일본의 경우,
1996년 장례식 평균 조문객이 180명이었던 것이
2023년에는 2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4분의 1 토막이 난 것이다.
고령화 때문이다.
80대, 90대에 돌아가시면 평생 함께한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거동이 불편해 오지 못한다.
자녀도 60대 은퇴 후라 회사 동료들도 오지 않는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이건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세상이 변했다.
5남매, 7남매가 기본이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1-2자녀 가정이 대부분이다.
자연스럽게 조문객의 수도 줄었다.
동료의 장례에 단체로 조문하던 직장 문화도 개인주의적 풍토 속에서 희미해졌다.
"조의금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니 다 빚"이라는
푸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문객 몇 명 안 오는데 3일 내내 텅 빈 장례식장을 지키는 민망한 상황,
부조금은 없는데 식장 대여비와 음식비로 수백만 원이 나가는 상황.
화환 백 개가 무슨 소용이며,
빚을 지면서까지 치러야 하는 장례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장례의 본질을 되찾을 기회가 될 수 있다.
돌아보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장례를 체면과 의례의 문제로 여겨왔다.
누가 더 많은 화환을 보냈는지,
얼마나 많은 조문객이 왔는지가 고인에 대한 예우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죽어서까지 과시하는 문화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 정작 고인을 제대로 추억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3일 내내 조문객 맞이하느라 정작 고인과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몸과 마음만 녹초가 되어 버리는 것이 과연 고인이 원했던 마지막일까.
서구에서는 슬픔에 잠기는 대신 고인의 삶을 기리는 '생명 축제'가 확산되고 있다.
고인이 사랑한 음악을 틀고, 그가 즐겼던 취미를 나누며,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불교 전통에서는 화려한 의식보다 고인의 영적 평안을 위한 수행과
염불로 진정한 위로를 전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례가 있다.
故 전유성의 희극인장은 직업 공동체가 함께 모여 고인의 업적과 삶을 진심으로 기렸다.
형식이 아닌 관계가, 과시가 아닌 추억이 중심이 된 장례였다.
무빈소 장례나 가족장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용 절감도 이유겠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장례가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진정으로 보내드리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조용한 장례는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품격 있고 의미 있는 이별일 수 있다.
소수의 진심 어린 사람들이 모여 고인을 기억하고,
유족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네며,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장례가 지녀야 할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가가 아니라,
그곳에 모인 이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고인을 기리는가이다.
화환의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조의금의 액수가 아니라 추모의 진정성이 고인에 대한 진정한 예우다.
가족끼리 하루 조용히 모여 고인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것,
그게 진짜 아름다운 이별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장례 문화를 만들어갈 때다.
허례허식을 벗어던지고,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며,
과시보다 진심을 담는 이별.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들리는 것이 있다.
고인이 남긴 삶의 울림이,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할 이별 앞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조용한 장례식장을 나서며 나는 생각했다.
이 적막이 결코 쓸쓸한 것만은 아니라고.
오히려 이 고요함이야말로 고인을 향한 가장 깊은 존중이자,
남은 이들을 위한 가장 따뜻한 위로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