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996이라는 세 자리 숫자가 품고 있는 의미는 단순하다.
하루 12시간, 일주일에 72시간을 일한다는 것.
중국에서 과로사와 노동자들의 반발로 2021년 불법으로 규정된 이 근무 방식이
이제 실리콘밸리에서 '자발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전세계가 주4일 근무로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실리콘밸리 전역에서 주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여유로운 테크 업계 커리어라는 오래된 약속이 시장 지배력을
향한 격렬한 단거리 경주로 교체되는 하위문화가 성장하고 있다.
AI 스타트업 릴라는 80명의 직원 전원이 996 근무를 하고 있으며,
채용 공고에 주 70시간 근무를 명시한다.
지키지 못하면 지원하지 말라고.
또 다른 회사는 996에 동의하는 직원에게
25% 급여 인상과 지분 2배 확대를 제안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토요일 법인카드 사용량이 급증했다는 데이터는
이것이 단순한 소문이 아님을 증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이들이 이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높은 급여, 많은 지분,
그리고 "지금 조금만 고생하면 평생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996 옹호자들은 '인생을 바꿀 회사'를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삶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신화를 들으며 자란 세대는
이를 '허슬 컬쳐(Hustle culture):개인의 생활보다 일을 중시하고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AI라는 기술은 이 욕망에 불을 붙인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원룸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방문을 나서지 못하고,
일이 끝나면 바로 옆 침대에 쓰러져 잠들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다시 컴퓨터를 켜는 삶.
그 개발자는 결국 지분을 모두 놓고 퇴사했다.
"저랑은 맞지 않았어요"라는 그의 말이 담담했던 이유는,
그가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996은 도박이다.
단기간에 모든 것을 걸고 인생을 바꿀 만한 부를 얻겠다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잃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면서도,
여전히 도박판에 칩을 거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점이다.
중국과의 경쟁, AI 시대의 압박, 투자자들의 기대.
그럴듯한 이유들은 많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일하는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20대의 청춘을 모두 바쳐 30대 중반에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젠슨 황처럼 "삶이 곧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가끔 여행을 가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996 모델은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전 세계로, 한국으로도 퍼져올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996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원룸에서 혼자 일하다 쓰러져 잠드는 그 개발자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는 지금 작은 IT 기업에서 일하며 나름 만족하며 산다고 했다.
어쩌면 그가 진짜 승자인지도 모른다.
지분도, 스톡옵션도, 경제적 자유도 얻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되찾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