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이야기
20~30년 전만 해도 회사에서도,
모임에서도 흔하게 들었던 질문이
"자네 어디 이 씨야?"
"전주이 씨입니다"
그 순간 부장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나도 전주 이 씨야. 무슨 파 몇대손인가?
"효령대군파 28대 손입니다!"
"그럼 우리 친척이네! 돌림자는?"
그날 이후 나는 부장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성씨에 대한 묘한 마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인 열 명 중 한 명이 김해 김 씨라는 통계가 있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은 시조를 둔 혈족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일까?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성씨와 본관,
그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한국에서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기부터다.
당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시 선진국인 당나라에서 성이 유행하였고,
성이 있으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장보고는 원래 성이 없었는데 당나라에서
잘나가는 장씨 성을 갖다가 붙힌 것이다.
이후 고려 왕건이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하면서
성씨는 점차 특권층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성씨는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조선 초기 양반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금 한국인 대부분은 자신이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이 아이러니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비밀은 조선 후기의 혼란기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고가 텅 비자, 조정은 공명첩을 팔기 시작했다.
돈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상인들은 물론 평민들까지 집과 논을 팔아 신분 세탁에 나섰다.
18세기에는 족보 위조가 성행했다.
유명한 양반집 족보를 빌려 위를 베끼고 아래에 자기 가족 이름을 슬쩍 끼워 넣는 식이었다.
병역 면제라는 실속 있는 혜택까지 있었으니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결정타는 1909년 일제의 민적법이었다.
민적법은 일본이 조선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그런데 하층민이나 여성은 성이나 이름이 없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민적법 실시로 전체 인구의 절반쯤 되는 하층민이 성을 갖게 되었다.
순사들이 집집마다 돌며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성을 만들기보다
김 씨, 이 씨, 박 씨처럼 이미 권세 있고 유명한 성을 골랐다.
천민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동 김 씨(조선 말기 최고의 권세 가문),
전주 이 씨(조선 왕조), 김해 김 씨, 밀양 박 씨(시조 설화가 있는)
같은 명문가 이름표를 달면 그럴듯해 보였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근본을 들먹이며 누구의 후손임을 자랑한다면,
99.99% 확률로 그건 환상이다.
요즘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백 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단군'의 후예일 뿐이다.
한편 "천방지축마골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각각 천은 무당, 방은 목수, 지는 장의사, 축마 골피 각각 소, 말뼈, 가죽을 다루는
백정을 대표하는 성씨라는 건데,
이는 조선 시대의 천민은 성이 없었으니까 성립 자체가 안 되는 말이다.
오히려 피씨 중에는 병조판서를 지낸 퍼득이,
마 씨 중에는 이방원을 도운 마천목 장군이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소문이 흔한 양반 성씨에 숨어든 평민 후손들이
자신의 신분이 들킬까 봐 퍼뜨린 유언비어일 수 있다고 추측한다.
성씨를 둘러싼 이런 이야기들을 알고 나면,
회식 자리에서 성씨와 본관으로 동질감을 확인하는 풍경이 새삼 우습게 느껴진다.
우리는 백 년 전 누군가 골라 단 이름표를 보고 천 년 혈연을 논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전주 이씨든 밀양 박 씨든, 혈통이 진짜든 가짜든,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성씨는 그저 허울 좋은 이름표일 뿐이다.
그 이름표 뒤에 숨은 진짜 나를 가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