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스캔들, 어우동 이야기

재미난 이야기

by 제임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우동을 조선의 기생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조선 왕가의 여인이었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언제나

한국 현대사에서 스캔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1950년대 박인수 사건(https://brunch.co.kr/@jamesan/343)은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며

화려한 사생활을 즐긴 것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1970년대 박동명의 7공자 사건(https://brunch.co.kr/@jamesan/344)

역시 한국의 카사노바로 불리며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런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남성들에게는 비난보다 은근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ea9_099_i2.jpg 보물 제1973호 신윤복의 필(筆) 미인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을 여성이 저질렀다면?

그것도 왕가의 여인이.

결과는 전혀 달랐다.

500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어우동 사건

그 시대가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억압된 시대를 거스른 한 여성의 파격적인 삶을 보여준다.


용재총화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어우동은 박선생의 딸이며 집안이 부유하고 아름다웠다."

조선시대 기록물이 여성의 외모를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대놓고 "아름다웠다"고 적었으니,

그녀의 미모는 정말 범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어우동(박어을우동·朴於乙宇同)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라 성을 뺀 별명이었다.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었다고 하니,

어쩌면 그녀의 운명이 이름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양반가의 딸로 유복하게 자랐고,

혼기가 차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다.

태강수는 종친을 이르는 칭호였고,

이동은 태종 이방원의 증손자로 왕실의 사람이었다.

돈도 명예도 미모도 갖춘 완벽한 신부.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이었다.


optimize.jpg 영화 '어우동 : 주인 없는 꽃' 2015년 개봉


하지만 남편 이동은 아름다운 아내에게 곧 싫증을 느꼈다.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된 그는 급기야 이혼을 요구했다.

조선시대 양반의 이혼은 왕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동은 무리수를 두었다.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내고는 황당한 주장을 늘어놓았다.


"제 집의 은쟁이와 아내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에서,

그것도 왕가의 여인이 장인과 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종부시에서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명백했다.

태강수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남편이 기생과 바람이 나서 아내를 쫓아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성종은 두 사람의 재결합을 명했다.

그러나 남편은 끝까지 어우동을 부르지 않았다.


20251003_174058.jpg 이장호감독의 '어우동'(1985)


친정으로 쫓겨나 독수공방하는 어우동의 가슴은 답답했다.

자기를 좋아한다는 남자들을 다 물리치고 시집왔는데,

이렇게 버림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보다 못한 여종이 말했다.

"옆집 정년이라는 사람이 태강수보다 월등히 잘생겼고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로 삼을 만합니다."

어우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우동은 버림받은 여자로 살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남자를 선택하고 마음껏 즐기는 자유로운 여성이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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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길을 걷는 어우동을 본 한 사내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끝까지 쫓아왔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한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는 방상수라는, 남편의 육촌 형제이자 왕족이였다.

법적으로 완전히 이혼하지 않은 신분에서

남편의 친척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패륜이었다.

하지만 어우동은 그와도 밤을 보냈다.


방상수는 그녀에게 깊이 빠졌다.

어우동이 벗어놓은 옷만 봐도 가슴이 떨렸고,

옷자락에서 나는 향기도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옷에 시를 적었다.


물시계는 또옥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어우동도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염료를 갈고 바늘로 찔러 '난(鸞)'이라는 이름을 한쪽 팔에 새겨 넣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왕가의 여성이 문신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어우동은 한 남자로 만족하지 못했다.

전악서의 생도 강창, 설이감의 향도, 남편의 팔촌인 수산수, 생원시 합격자 이숭원...

그들의 이름이 그녀의 몸에 하나둘 새겨졌다.

협박하는 이도 있었다.


"네가 남자들과 한 짓을 다 알고 있소. 나와도 해주시오."


어우동은 그와도 밤을 보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진 남자는 무려 17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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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한양 곳곳에 퍼졌다.


"길가에 집을 얻어 오가는 사람을 지목하며 점수를 매긴다더라."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그녀의 일탈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희대의 스캔들은 성종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의금부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어우동은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혔다.

신하들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유배로 그치자"는 의견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먼저 투옥된 방상수는 어우동에게 조언했다.


"사통한 자들을 빠짐없이 말하면 중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어우동은 관계했던 남자들의 이름을 모두 불었다.

그들은 끌려가 곤장을 맞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평소 인자하고 너그러웠던 성종이라면 선처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 밖의 명이 떨어졌다.


"어우동은 음탕하고 방종하며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어떻게 징계하겠느냐.

교형에 처하라."


저잣거리 한가운데 구경꾼들이 모였다.

어우동과 여종이 함께 묶여 죽음을 기다렸다.

어떤 이는 혀를 찼고, 어떤 이는 침을 뱉었다.

이윽고 줄이 당겨졌고, 어우동은 생을 마감했다.

그때가 1480년이였다.


한편, 50년 전인 세종 때에 역시 검한성(檢漢城·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낸

유구수의 딸인 유감동이 사대부 남성 40여 명과 간통한 죄로 유배를 당했다.

세종 때보다 성종 때 유교 윤리가 더 심화됐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우동이 교형을 받은 뒤 어우동과 관련된 양반 남성들은

한바탕 큰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풀려나왔다.

그리고 출세하는 데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천한 기생과도 같은 행동을 한 어우동 때문에 오히려

많은 남성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논의되어 남성들은 풀려나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우동이 중죄를 면하기 위해 고의로

죄 없는 많은 남성을 끌어들였다는 기록까지 등장하였다.


1.jpg 신윤복의 기다림


왜 성종은 이렇게 가혹한 판결을 내렸을까?

어떤 이들은 당시 성종이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어우동에게 화풀이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정절을 강요하는 유교 사회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고도 한다.


어우동의 이야기는 억압된 시대를 살았던 한 여성의 저항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방종이었을까?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조선시대에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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