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1955년 여름,
한국 사회는 충격적인 사건 하나로 떠들썩했다.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70여 명의 여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한 '박인수 사건'이었다.
박인수는 6.25 전쟁 참전 후 애인의 배신으로 상처받은 뒤 변했다고 알려졌다.
박인수의 수법은 교묘했다.
군 장교를 사칭하며 국일관, 낙원장 등 고급 유흥업소를
드나들며 여성들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관계를 맺었다.
당시 군 장교의 사회적 지위는 대단했고,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던 시절 여성들에게
그는 든든한 의지처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박인수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여성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박인수는 70여 명의 여성 중에 단 한 명만이 처녀였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는 기록은 당시 사회의 이중적 성 관념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은 연일 '한국판 카사노바'라며 흥미본위로 다뤘고,
'자유부인', '사모님' 등 유행어까지 나왔다.
보수적인 유교 사회에서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사회 전체가 도덕적 혼란에 빠졌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에 재판을 하던 덕수궁 법원 주변에는
전국에서 그의 얼굴을 보러 온 여성들이 진을 칠 정도였다.
1955년 7월,
1심 재판부에서 박인수가 남긴 유명한 발언이 있다.
담당 판사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며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여성의 정조 개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판결이었고,
재판정은 발칵 뒤집혔다고 전해진다.
1심은 무죄, 그러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최종심에서는
공무원(장교) 사칭죄로 1년을 선고했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성적 자유는 분명 확대되었다.
2015년에야 성적 자기 결정권의 존중과 전 세계적 추세 등을 이유로
간통죄 위헌결정이 내려진 것만 봐도,
개인의 성적 자율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SNS와 데이팅 앱의 발달로 만남의 기회는 무한히 열렸고,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책임과 성숙함을 전제로 한다.
박인수가 70명의 여성을 속여 상처를 준 것처럼,
오늘날에도 상대방을 기만하거나 상처 주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성적 자유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일회적 만남을 추구하면서도 진실한 관계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1950년대 박인수 사건은 억압적 사회에서 터져 나온 일탈의 극단적 사례였다면,
현재는 과도한 자유 속에서 관계의 진정성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책임의 균형이다.
성적 자율성을 존중하되,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진실성을 잃지 않는 성숙한 관계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때다.
박인수 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타인을 존중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