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1982년 봄,
대학 2학년으로 신학기 맞이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
강의실로 누가 찾아왔다.
그는 고교 문학서클에서 친하게 지냈던 1년 후배였다.
"형이 대학을 간 뒤 나도 형 따라서 가고 싶어서
이 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얼마나 반가웠던지 둘은 바로 학교 앞 주점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하지만,
생두부 안주 하나에 소주 20병이라니...
그것도 지금의 15도가 아니라 25도!
원래 술도 못 마시는 나는 오버를 해도 너무 많이 했다.
오바이트는 물론 병원 응급실까지 가야 했었다.
그 후론 알레르기가 생겨서 소주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요즘 가끔 소주가 생각난다.
추억을 마시고 싶을 때는 서재에서 혼자 마신다.
소주를 맥주로 희석시켜서 소위 폭탄주로 먹는다.
혼술은 의외로 편하고,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아버지는 늘 퇴근 후 작은 접시에 멸치를 담아 옆에 있는
소주 대병을 놓고 드시곤 했다.
그런 다음, 높은 도수의 소주를 한 모금 마시면 실눈을 뜨며
“아, 시원하다” 하셨다.
그때의 소주는 30도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꽤나 독한 술이었을 터.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 맛에 익숙했고,
그 독함이 오히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요즘은 소주가 옛날 시절에 비하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음료처럼 변해버렸다.
100년 전 35도에서 시작해 지금은 반도 안 되는 도수로 내려앉은 셈이다.
아버지가 보셨으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 “이게 무슨 소주냐” 하시며 화을 내지 않았을까 싶다.
소주의 역사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가양주 문화가 사라지고 공장식 희석소주가
등장한 것부터 시작해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인해
쌀 대신 고구마와 옥수수 전분으로 소주를 만들게 된 것,
1970년대 도별 대표 소주가 생겨난 것까지.
소주 한 병에 스민 이야기는 생각보다 깊고도 묵직하다.
우리 세대는 25도 소주를 마셨다.
그 시대 소주는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고,
직장인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마시는 술이었다.
광고에도 터프한 남자 모델이 등장해 “두꺼비”를 외쳤다.
"빨간 두꺼비"는 25도짜리 희석식 소주 '진로'의 별명이다.
병에 그려진 빨간 두꺼비 때문에 진짜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진로 25는 예전에는 진로골드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다
2023년에 진로 25도로 제품명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1998년, 참이슬이 등장하며 소주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도수는 23도로 낮아졌고,
광고에는 이영애가 등장해 여성과 젊은 층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주 시장은 경쟁적으로 도수를 낮추는 ‘물타기’에 들어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14.9도라는 경이로운(?) 수치에 도달했다.
소주의 도수가 낮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원가 절감도 한몫했다고 한다.
도수를 0.1도 낮출 때마다 병당 0.6원을 아낀다니,
어마어마한 양이 생산되는 소주 시장에서 이 효과는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소비자의 선호 변화다.
건강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여성 소비자의 증가,
그리고 식사와 함께 가볍게 마시는 문화가 정착하면서 소주는
자연스레 도수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은 유독 식사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높은 도수보다는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 가벼운 술을 원한 것이다.
이제 소주는 예전의 그 독한 추억 속의 술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가볍게 사 마실 수 있는 술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주를 마실 때면 후배와 먹던 생부두와 쓰디쓴 소주가 생각난다.
아마 그때의 소주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지만, 정이 담긴 술이었을 게다.
시간이 흐르고 도수가 바뀌어도,
소주가 가진 추억의 무게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소주는 이렇게 계속 순해지다가,
언젠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독하게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도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때면,
그리움은 여전히 25도로 살아있다.
진로 소주 70년대 80년대 추억의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