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옛날에 '코끼리 밥솥'이라 불리던 조지루시 밥솥이었다.
일본 출장 쇼핑에 1등 목록이었다.
1980년대 말,
해외여행이 꿈같던 시절,
일본제 가전제품은 모든 주부들의 로망이었다.
그 시절 일본제 가전제품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숭배에 가까웠다.
1991년 신문기사를 보면,
대기업 사원들이 일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며
일본산 VTR 카메라와 전자제품을 몰래 가져오다
김포공항 세관에 걸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5천만 원 상당의 전자제품을 무더기로 구매해 밀수하려 했다니,
그때만 해도 일본제는 그만큼 탐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며칠 전 전자제품 매장에서 본 풍경은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삼성과 LG의 최신형 TV제품들이었고,
일본 브랜드들은 구석 한편에서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매장 직원에게 "일본제 밥솥 어디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요즘엔 쿠쿠나 쿠첸을 많이 찾으시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때 세계 최고의 브랜드였던 조지루시는
이제 한국 브랜드들에게 밀려 프리미엄 밥솥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거대한 내수 시장과 까다로운 자국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세세한 기능들을 추가했다.
세탁기에 불필요하게 다양한 세탁 코스를 넣고,
냉장고에 자동 제빙 기능을 집어넣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런 기능들이 해외에서는 오히려 불필요하거나
고장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석회질이 많은 유럽에서는 자동 제빙 기능이 전혀 필요 없었고,
복잡한 기능들은 가격만 올릴 뿐이었다.
반면 한국과 중국 기업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심플하면서도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어냈다.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한 가성비 제품들이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소프트웨어와 플랫폼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하드웨어에만 집중했던 일본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 변화에 뒤처지고 말았다.
30년간의 장기 불황도 일본 기업들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디플레이션으로 제품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가 절감만을 추구하다 보니,
한때 자랑이던 품질과 고객 서비스마저 뒤처지게 되었다.
모험적인 투자 대신 안정적인 수익에만 집중하면서 혁신의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2009년 파나소닉이 중국 하이얼에 아쿠아를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도시바, 샤프, 히타치까지 하나둘씩 해외 기업들에게 팔려나가고 있다.
얼마 전 히타치가 한국 기업에 매각될 수도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한때 우리가 그토록 선망했던 그 브랜드를 이제 우리가 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코끼리 밥솥 하나 구하려고 그렇게 애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일본의 유명한 회사를 우리가 인수한다니.
격세지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우러러봤던 것이 이제는 우리 발밑에 있고,
우리가 따라가려 했던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앞서가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보며 우쭐해하기보다는,
세상의 흐름이 얼마나 빠르고 무상한 지를 깨닫게 된다.
오늘의 1위가 내일의 1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일본의 사례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코끼리 밥솥을 애지중지하던 아내는 지금 한국산 밥솥으로
더 맛있는 밥을 지어준다.
시대는 변했고, 우리도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오래 정상에 머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