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분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따님이세요"라고 말했을 때의 그 순간을.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던 마음 한편에 스며든 미묘한 아쉬움을,
그리고 그것을 애써 감추려던 나와 아내의 표정을.
부모님들의 "다음엔 아들이겠지"라는 위로 섞인 말씀까지.
불과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당연히 아들을 원했다.
가문의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낼 존재,
든든한 가장이 될 아이를 꿈꿨다.
집안 어른들은 "첫아이가 딸이면 아들 낳을 때까지 낳아야 한다"라고 하셨고,
우리 부부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주변의 모든 가정이 그랬고, 사회 전체가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딸아이가 자라며 보여준 세심함과 따뜻함,
공부에 대한 집중력과 성취도는 우리의 편견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는 지혜에서도 딸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최근 발표된 조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딸을 선호하는 비율이 세계 1위라는 것이었다.
1992년에는 58%가 아들을,
10%만이 딸을 원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어 28%가 딸을,
15%가 아들을 선호한다고 했다.
특히 30-40대 여성들의 딸 선호도는 40%를 넘었다고 한다.
이런 변화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남성의 노동력과 가문 계승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정서적 유대감과 실질적 돌봄 능력이 더 중시되고 있다.
여아 선호 사상의 확산에는 여자 아이를 ‘키우는 재미’가
더 크다는 생각과 노후를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겠다는
인식의 확산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치매 노인을 돌보는 가족 중 여성 비율이 82.4%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는 이런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딸이 부모 부양에 더 적극적이라는 인식이
단순한 편견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딸 낳는 비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
6개월 간 아내는 육류를, 남편은 과일·야채류를 많이 먹어야 한단다.
의학적 검증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딸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으면...
우리 때는 결정적인 순간에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면
남자애를 낳는다는 속설이 한 때 유행 했었다.
흔히들 “딸 둘은 금메달, 딸 아들은 은메달, 아들 둘은 '목메달'"이라 한다.
물론 이런 변화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여전히 성별에 따른 역할 기대와 편견이 존재한다는
방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딸은 돌봄을 잘할 것이고,
아들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또 다른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는 사실이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부모 세대와 딸을 더 선호하는
현재 세대 사이의 간극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 변화가 단순히 선호도의 역전이 아니라,
성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길 바란다.
이제 내 딸은 성인이 되어 자신만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아이의 성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느냐가 진정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우리 사회가 모든 아이들에게 성별에 관계없이 동등한 기회와
사랑을 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