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어릴 적 우리 동네 입구에는 언제나 낯익은 빨간 우체통이 서 있었다.
그 우체통 옆을 지날 때마다,
혹시 내 이름으로 온 편지가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속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선하다.
그리고 그 우체통과 한 세트처럼 다니시던 분이 있었다.
반쯤 벗겨진 자전거를 끌며,
가죽 택배 가방을 어깨에 메신 채 이 집 저 집 현관을
오르내리시던 우체부 아저씨다.
그분의 모습은 정녕 ‘기쁨의 전령’ 그 자체였다.
아저씨가 동네 골목에 모습을 드러내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얼굴에도 미묘한 기대감이 스쳤다.
손편지 한 통, 고향에서 보내온 간장이나 된장이 든 작은 소포,
멀리 유학 간 자식의 안부를 전하는 엽서,
혹은 열심히 준비한 수험생에게 도착하는 꿈같은 대학 합격 통지서…
그 편지 봉투나 갈색 소포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기다림의 결실이요,
인연의 무게였고,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생각하는 이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우체부 아저씨의 자전거 체인 소리는 기쁜 소식이 다가오는 전주곡처럼 들렸다.
세월은 유독 그 청색 제복의 의미를 무겁게, 차갑게 바꾸어 놓았다.
어느덧 우체통은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우체부 아저씨를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다.
만나더라도 그분의 손에 쥐어진 봉투들은
이제 낯설고 불안한 색깔로 다가온다.
하얀 봉투는 대부분 각종 공과금 고지서나 독촉장이다.
더욱 가슴 철렁하게 하는 것은 뚜렷이 구분되는 ‘과태료 고지서’다.
그것은 세상이 내게 보내는 경고장이자 벌점이다.
미납 독촉장, 과태료 통지서, 법원에서 날아온 소환장…
이름만 봐도 숨이 막히는 것들이다.
설상가상으로 집배원을 가장한 신종 보이스 피싱도 판을 친다.
카드 배송을 가장한 교묘한 수법이다.
우편함을 열 때의 그 조마조마함은 여전하지만,
그 안에는 기대보다 두려움이,
설렘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가득하다.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은 이제 ‘불쾌한 소식의 배달자’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분의 발걸음이 내 현관에 멈출 때면,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하게 된다.
무슨 부담이 또 찾아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이런 격세지감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과거 그 편지 봉투가 담고 있던 정(情)의 무게다.
편지 한 장을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기까지의 수고.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
배달되어 손에 쥐었을 때의 설렘.
그 모든 과정은 디지털 시대의 즉각적인 메시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정직함과 정성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
편지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마음을 실어 나르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편리함과 속도를 얻었다.
문자, 이메일, SNS는 순식간에 소식을 전한다.
온라인으로 모든 공과금을 납부하고,
택배 앱 하나로 전 세계 물건을 문 앞까지 받는다.
현대의 우체부 역할은 수많은 택배 기사들로 분산되었다.
그들의 바쁜 발걸음은 과거의 우체부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다.
하지만 그 소포나 봉투 안에는 정작 ‘마음’이 실려 오는 일이 거의 없다.
물건은 많아졌어도 정성은 옅어졌고,
속도는 빨라졌어도 기다림의 의미는 사라졌다.
우체부 아저씨가 가져오던 기쁨은,
이제 택배 기사가 배달하는 수많은 박스들 속에서 쉽사리 묻혀 버린다.
격세지감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갔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우체부 아저씨가 전하던 편지 봉투의 기쁨과
지금 편지 봉투가 주는 불안의 대비는,
세월이 흐르며 변해버린 소통의 본질과
인간 관계의 온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편리함의 이면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무게만 남겨진 것은 아닐까?
어릴 적 동네 우체통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그 순수한 기대감,
그 마음의 무게를,
이 속도에 찌든 시대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더욱 쓸쓸해진다.
그 편지 봉투 속에 담긴 기다림과 반가움의 정,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식(消息)’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