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전시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전시장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 있고,

벽에는 "만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미술관은 언제나 그렇게 예술을 보호하고,

관람객을 통제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질서를 교묘하게 비틀어버린다면?

뱅크시는 바로 그 일을 해냈다.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현대미술관.

세계 최고의 미술관 이름 앞에 '도둑'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뱅크시는 이 권위 있는 공간들에 몰래 잠입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20251007_222743.jpg 도둑전시를 하는 뱅크시의 모습


2005년, 뱅크시는 영국을 대표하는 대영 박물관 역시 그의 타깃이었는데,

카트를 끌고 있는 원시인의 모습이 새겨진 뱅크시의 암각화는

뱅크시 본인이 직접 언급하기 전까지 며칠 동안 그 자리에서 버젓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20190203_01-1.jpg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유리로 둘러싸인 흥미로운 딱정벌레를 걸어 놓았는데,

딱정벌레는 미사일이 부착된 에어픽스 전투기 날개를 달고 있었다.

캡션에는 ‘위투스 오르가인스투스’ 딱정벌레라고 되어 있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 대통령이 행한 연설의 한 대목으로서

그의 재임 시절 대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의 적You are either with us, or against us’을 비꼰 말장난〕.

놀라운 건 사람들이 며칠 동안 그것이 가짜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다는 사실이다.


image.png 위투스 오르가인스투스 딱정벌레 ‘Withus Oragainstus’ Beetle, 뱅크시, 2005


앤디 워홀의 〈32개의 캠벨 수프 통조림〉이 자리 잡은 뉴욕 현대미술관 3층에는

테스코 밸류 토마토 크림 수프를 그린 〈수프 캔 할인〉이라는 작품을 두었다.

그는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5분 동안 보고 있었다.


IMG_0544.jpg 앤디 워홀의 캠벨 슈프캔을 패러디한 작품


2003년 Tate Britain에 난입하여

‘Crimewatch UK Has Ruined the Countryside For All of Us’ 라는

작품을 미술관 내 한적한 곳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르네상스 시대의 오래된 명화와 같은 작품에 Police Line 테이프를 붙여서

패러디한 작품은 기존 전통적인 미술의 권위 의식에 대한 조롱과 함께

관람객들이 미술관에서 이러한 것을 그저 스쳐 지나치는 것에 대한

풍자와 위트를 가볍고 신선하게 이룩한 뛰어난 행위예술을 담고 있다.


IMG_0494.jpg Crimewatch UK Has Ruined the Countryside For All of Us


이 '도둑 전시'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뱅크시가 겨냥한 것은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태도였다.

우리는 미술관에 가서 진짜 작품인지,

가짜인지도 모른 채 그저 유명하다는 이유로 사진만 찍고 지나친다.

박물관이라는 권위 있는 공간에 걸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술이라

믿어버리는 우리의 맹목성을 뱅크시는 정확히 포착했다.


그의 도둑 전시는 예술이 어떻게 규정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작품의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술이 되는가?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을 허락 없이 전시함으로써 예술계의 권위 시스템을 통렬히 조롱했다.

예술은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한복판에 그려진 낙서도,

미술관 벽에 몰래 걸린 돌조각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


뱅크시가 "예술은 불안한 자들을 편안하게 하고, 편안한 자들을 불안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도둑 전시는 미술관이라는 안전하고 권위적인 공간에 균열을 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보는 행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뱅크시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그가 남긴 그림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들어놓은 그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https://youtu.be/ibTXh4Pg3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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