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작품 앞에 서면 황금빛으로 물든 화려함 너머로
수많은 여인의 눈빛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여인의 초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고 한 화가를 살았던 여인들의 생생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을 유심히 봐라."
그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에로티시즘의 노골적인 표현 사이로,
그가 평생 깊이 애정과 존경을 가졌던 여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를 빛낸 여인들
그의 예술 세계에 깊이 관여한 여인들은 무척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에밀리 플뢰게 (Emilie Flöge)는 그의 정신적 연인이자 평생의 동반자.
클림트는 그녀에게 유산의 절반을 남겼으며,
30여 년간 4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은 그녀의 우아하고 독립적인 기품을 잘 보여준다.
‘키스’ 속 여성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도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재밌는 것은 클림트의 두 여인(평생 동반자 에밀리와 유부녀인 아델레)
모두 키스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델레는 클림트에게 가장 중요한 모델이자
클림트의 황금시기와 빈의 벨 에포크를 동시에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델레는 살롱을 운영하는 빈 상류층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Adele Bloch-Bauer)는 후원자이자 모델이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Ⅰ'은 '황금의 여인'으로 불리며,
그녀의 초상을 되찾기 위한 유족의 노력을 다룬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미치 (마리 침머만, Marie "Mizzi" Zimmermann):
모델이자 연인이었고, 정신적 사랑이 에밀리 플뢰게였다면,
어두운 밤의 육체적 사랑은 마리아 짐머만의 것이었다.
클림트의 두 아들의 어머니였으며,
임신한 그녀를 모델로 삼은 '희망 Ⅰ'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미치가 낳은 아이들은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알마 말러 (Alma Mahler, 결혼 전 쉰들러):
클림트가 일시적으로 깊은 연모를 품었던 여인.
그녀는 회고록에서 클림트를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이름 없이 그의 아틀리에를 채웠던 수많은 모델들이 있었다.
클림트는 그들을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그들을 통해 관능의 본질과 생명의 근원을 캐냈다.
그녀는 지금도 많은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중 클림트의 <다나에>는 가장 유명하다.
알마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서 주제를 따온 것이다.
이 그림은 클림트의 특징인 섹슈얼리티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붉은 빛깔의 머리카락, 지그시 감은 눈, 벌어진 입술, 무엇인가를 감아쥔 손, 발그레한 볼,
그리고 터질 듯한 허벅지와 가는 종아리,
다나에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황금 소나기로 변한 제우스가 잠든 다나에의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클림트가 알마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19세 때였다.
알마는 동료화가의 딸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미모에 반한 클림트는 알마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알마가 처음으로 키스한 남자가 클림트였다고 하는데,
알마의 일기를 훔쳐 읽은 어머니에 의해 클림트는 쫓겨나고 말았다.
관능과 생명력의 화신
그가 그린 여인들은 결코 단순한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성경의 영웅을 그린 '유디트'는 관능과 위험한 힘을 지닌 여성의 초상으로 변모했으며,
임신부를 그린 '희망 Ⅰ'에서는 생명의 기적과 죽음의 그림자가 공존한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여성의 성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는 그의 시각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 에밀리
그러나 이 모든 여인들의 저편에,
클림트의 마지막을 지킨 한 여인의 이름이 있다.
에밀리 플뢰게다.
클림트가 뇌출혈로 쓰러져 죽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단순한 연인이 아닌,
빈에서 자신만의 패션 살롱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커리어 우먼이자,
클림트가 예술적 동반자라고 여긴 인물이었다.
그가 에밀리와 함께 보낸 여름휴가 때 그린 풍경화들에서는
여인의 누드 대신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담겨 있다.
에밀리는 그에게 현실의 관능을 초월한 고요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클림트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대부분이 사교계 여성들의 초상화였다.
물론 주문에 의한 것이 많았고,
이들 초상화들은 대체로 매우 화사하고, 화면장식이 풍성하며,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장식성과 평면 효과는 그려진 이의 고귀함을 한층 분명하게 인식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클림트는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과 색채로 비엔나의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당시 클림트의 여성 초상화를 갖는 것은 사교계에
진출한 많은 여성의 로망이었다고 한다.
실제 클림트는 이들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큰 부를 쌓았다.
클림트의 독특한 장식 표현은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독특한 관능의 미학으로 그림의 주인공이 매우 감각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련된 한편 야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간혹 보수적인 고객이 완성된 초상화의 수령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하곤 했다고 합니다.
클림트는 죽은 지 100년이 훌씬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그림 속에 스민 여인들의 향기로 우리를 매혹한다.
그의 작품은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생을 관통하는 사랑과 죽음,
그리고 여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탐구가 자리 잡고 있다.
시대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한 황금의 화가와,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되고 사랑받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중 ‘프로일라인’은 오스트리아어로 ‘젊은 숙녀’라는 뜻이다.
실제 모델인 리제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제를 대표하던 한 기업가 가문의 여인이었다.
그림을 의뢰한 이는 리제르 가문의 유명한 예술 후원자로 ‘릴리’라 불리던 여성이었다.
<마리 브로이니크 초상>은 작품 속 여인이 금세라도 몸을 돌려 그림에서 걸어나올 것 같이 생생하다.
마리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신분 상승을 한 여인이다.
그녀는 클림트의 정신적 동반자인 에밀리 플뢰게가 운영하던 패션 살롱의 고객으로 드나들면서
클림트와 연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