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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필보국(畵筆報國)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화필보국(畵筆報國)",

붓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의 이 말이 얼마나

쓰라린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우리 화가들 중 일부는 정말로 붓으로 나라에 보답했지만,

그 나라는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다.


경향신문에서 친일경향의 미술인에 대해 세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매판적 친일파 미술인이고

둘째는 시국미술에 참여하는 것이며

세째는 작품을 팔아 헌금한 화필보국(畵筆報國)의 형태로 나누었다.


이당 김은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인간의 변절이 얼마나 극적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던 그가,

불과 십여 년 후 일본에서 유학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금차봉납도'를 그리며 조선 여성들이 일본 총독에게 금비녀를

바치는 모습을 찬양했던 그의 붓끝에서,

과연 어떤 심정이 흘러나왔을까.

젊은 날의 민족의식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당 김은호의 <금차봉납도>, 1937


김은호, 순종의 어진, 1928


운보 김기창의 경우는 더욱 안타깝다.

뛰어난 재능으로 일찍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그 재능을 고스란히 일제에 바쳤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작품 제목부터가 섬뜩하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본군으로 내보내는 것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과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예술가로서의 양심은 어디에 묻어둔 것일까.


20251014_145733.jpg 김기창,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20251014_145459.jpg 김기창의 <적진육박> 1944 / <총후병사> 1944


김인승 역시 마찬가지다.

'장미 화가'라는 아름다운 별명과는 달리,

그가 그린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악랄한 정책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터치로 여성의 누드를 그리던 그 손이,

어떻게 동족을 죽음으로 내모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백장미.jpg 김인승의 백장미


66.jpg 김인승이 소속된 친일 단광회 회원 19인이 합작해 그린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화'


정현웅(1911~1976)은 가장 친일적인 작품을 많이 그린 작가로 꼽는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잡지 표지화를 많이 그렸다.

‘신시대’, ‘소국민’, ‘방송지우’ 등 각종 잡지에 근로보국, 식량 증산 등

식민 통치 정책을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렸다.


20250927_073304.jpg 정현웅은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친일 그림을 그린 작가인데 ‘친일 미술인’ 명단에는 빠졌다. ‘고하제독’(왼쪽)과 ‘조광’ 1937년 10월 호 표지


99999.jpg 박득순의 1945년 작 ‘특공대’


이들의 행적을 보며 가장 씁쓸한 것은,

해방 후에도 이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한국 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각종 문화훈장과 상을 받으며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친일의 과거는 묻혀버리고, 오직 예술적 성취만이 기억되었다.


예술가는 시대의 양심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사람이라면,

그 아름다움이 진실에 기반해야 하고,

정의로운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권력과 안위를 위해 붓을 꺾었다.

아니, 붓을 꺾은 것이 아니라 붓끝을 비틀어 거짓을 그렸다.


888.jpg 박래현이 기도 가즈히데라는 일본 이름으로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단장하다’ 는 총독상을 받았다


물론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우리가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생존의 압박, 예술 활동의 제약, 일상의 두려움 속에서 그들도 나름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붓을 꺾고 침묵을 선택했거나,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의 선택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화필보국은 조선의 혼을 지키며 우리만의 예술을 꽃피우는 것이었을 텐데,

이들은 일본의 국가주의를 선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는데,

이들의 붓은 동족의 가슴을 찌르는 칼이 되었다.


역사는 잊혀져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런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에게는 더욱 엄중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손이 추악함에 물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https://youtu.be/YiZfYKQNi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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