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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품은 화가, 호아킨 소로야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햇살이 물방울을 스치며 반짝이는 바닷가,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 풍경을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긴 화가가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거장 클로드 모네가 “빛의 거장”이라

칭찬한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llora, 1863~1923)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순식간에 따스함으로 채운다.

그러나 그 빛나는 명성은 한때 깊은 그림자에 가려졌다가,

오늘에야 다시 조명받고 있다.


SSI_20230829141203.jpg 호아킨 소로야, ‘바닷가 산책’, 1909


소로야는 1863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콜레라로 부모를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예술에 대한 재능은 어린 나이부터 빛을 발했다.

10대 후반부터 이미 미술상을 휩쓸며 두각을 나타냈고,

21세에 그린 대형 역사화 <1808년 5월 2일>은

스페인 미술전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재능은 로마 유학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과 프랑스 인상주의를

흡수하며 더욱 깊어졌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슬픈 유산>이었다.

이 그림은 장애 아동들이 물리 치료를 위해 바닷물에 목욕하는 모습을 담았으며,

사회적 아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녹여낸 걸작이다.

이를 계기로 소로야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1.jpg 호아킨 소로야, 슬픈 유산(일부 확대), 1899


슬픈유산 작품 속에 아이들은 당시 유행했던 성병 매독,

또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부모로부터

성치 못한 몸을 물려받은 존재였다.

어른의 일탈, 그게 아니면 사회의 무시와 세상의 외면이 낳은 새하얀 희생양.

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것을 통한 물리치료를 위해 나온 모습이었다.


2.jpg 호아킨 소로야, study for 슬픈 유산


소로야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인상주의가 부드러운 빛을 추구했다면,

소로야의 그림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직사광리과 짙은 그림자의 대비를 강조했다.

그는 “빛의 화가”다운 면모를 발휘하며,

흰색 물감에 다양한 색을 섞어 빛의 찬란함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그의 작업 방식 또한 남달랐다.

스튜디오 안이 아닌, 바닷가에 이젤을 직접 세워두고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광을 생생하게 포착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때로는 유화 물감에 모래 알갱이가 섞이기도 할 정도로 현장을 중시했다.


그의 대표작인 바다 시리즈는 이처럼 현장에서 느낀 생생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푸르른 지중해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빛,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해변가의 평화로운 일상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동감 넘친다.


3.jpg 해변 달리기, 1908


소로야는 40년간의 작가 생활 동안 4,000점이 넘는 작품과 8,000점에

이르는 드로잉을 남길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09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개인전은 개막 4주 만에 16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그의 명성을 정점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1920년,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3년 후인 192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미술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세계 대전을 거치며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가 등장했고,

구상적이면서도 밝은 낙관을 담은 소로야의 작품은 “구시대적”으로 치부되었다.

마치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지면 찾아오는 어둠처럼,

소로야의 예술도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4.jpg 아침 햇살에 발렌시아 해변, 1908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다시 소로야의 그림에서

위로와 힐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해석이 필요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그의 작품들은

현대인에게 소중한 위로가 되고 있다.


호아킨 소로야는 빛을 그림으로 번역한 시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삶에 대한 사랑과 인간 내면의 따뜻함을 전달한다.

한때 미술사의 흐름에 가려졌지만,

진정한 예술은 결국 시간을 이기고 빛을 발한다는 것을 소로야의 삶이 증명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과 지중해의 푸른 물결,

그리고 그곳에서 쉼을 얻은 사람들의 순수한 기쁨을 만날 수 있다.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풍경들이 사라질 테니까”

“태양 빛은 쉬지 않고 세상의 겉모습을 바꾼다.”

-호아킨 소로야-


5.jpg 돌아오는 고깃배, 1984


6.jpg 발렌시아 어부들, 1897


7.jpg 밀수꾼들, 1919


https://youtu.be/pI_RsjHz9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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