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무엇인가?

명언따라 살아보기

by 제임스

의심에서 시작된 철학의 혁명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의 출발점이었다.

수천 년간 인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고,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러한 믿음들이 오류이었음을 증명했다.

마치 정성껏 그린 그림들을 찢어버리고 새 도화지를 펼치듯,

데카르트는 모든 기존 지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이 있는가?

우리가 믿었던 지식들이 무너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 세상에 완전한 진실은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방, 앉아 있는 의자,

먹고 있는 음식까지 모두 허상일지 모른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과감히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의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호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하며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세상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가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명료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짧은 명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파급력은 실로 혁명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진실의 중심을 신이나 권위가 아닌 '나'에게 옮겨놓았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한다는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믿는 거, 내가 좋아하는 것, 이것은 진실이다.

지금까지의 상식, 관념, 지식, 사회 질서 등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생각하는 주체의 탄생과 혁명의 시대

데카르트의 철학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대전환을 이끌어냈다.

인류는 더 이상 신에게 순종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고자 했다.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려는 계몽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사상적 토양 위에서 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왜 다수인 우리가 소수의 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66.jpg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1789


이 질문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정신을 사회 체제에 적용한 결과였다.

프랑스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고,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선언은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후에도 1848년 노동계급 혁명, 1871년 파리코뮌, 1968년 68운동 등을 통해

모순된 것을 과감히 바꾸려는 정신을 이어갔다.

그들은 세상의 제도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논쟁하고 토론했다.

이런 태도는 때로 이기적이거나 유별나 보일 수 있었다.


"주망 푸(Je m'en fous, 난 상관없어)"나 "싸메떼걀(Ça m'est égal, 난 관심 없어)"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그들의 모습은,

집단의 화합을 중시하는 일본의 '와(和)' 사상과는 정반대이다.

** 일본의 '와(和)' 사상은 집단 내 조화와 질서,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일본 고유의 정신적 가치관을 의미한다.


상대성의 인정과 갈등의 시대

하지만 데카르트가 말했듯,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의 시각에서 일본인은 답답하게 보일 수 있고,

반대로 일본인의 눈에 프랑스인은 얄밉게 보일 수 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조직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고,

MZ세대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프랑스적 사고에 가깝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시사하듯,

나에서 출발하는 생각들은 너무나 다양하다.

문제는 내 생각만이 옳다는 테두리를 만들고

상대를 강압적으로 그 안에 가두려 할 때 발생한다.

국제적 갈등, 세대 갈등, 가족 갈등 등 온갖 갈등으로

우리는 스트레스 받으며 현재라는 소중한 시간을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게 된다.


기술 혁명과 존재의 재정의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데카르트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존재론적 질문에 직면해 있다.

인공지능, 메타버스, 디지털 아트 등 과거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술들이 '존재'의 의미 자체를 흔들고 있다.

가상현실과 디지털 기술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실체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공지능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고,

디지털 공간에서 경제적 가치가 창출되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중세에는 신의 존재가 절대적 진리였기에 별다른 논증이 필요 없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사고를 중심에 놓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우리는 이제 '인식됨으로써 존재하는

' 뉴 존재론(New Ontology)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존재는 더 이상 고정된 실체나 자기 확신의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인식과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인식이 만드는 존재

미켈란젤로를 보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이 그를 인식하는 순간,

미켈란젤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규정된다.

어떤 이는 그를 뛰어난 과학자로,

또 다른 이는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한다.


하나의 존재는 고정되고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다양한 인식 주체들의 시선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다층적 의미의 총합이 된다.


디지털 객체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아트는 단순 이미지가 아닌 감상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인공지능도 인간의 인식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화폐, 국가, 법처럼 실체는 없지만 집단적 인식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개념들처럼,

존재는 점점 인식과 기능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생각하는 AI와 존재의 역설

A씨는 인공지능 거래 시스템을 통해 주식과 코인을 거래한다.

AI가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패턴을 학습하며,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 AI는 '생각'하는 것인가?

데카르트의 논리를 따르자면, 생각하는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AI도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와 만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기 인식적 주체,

즉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AI가 정말로 자아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복잡한 알고리즘의 결과물인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더 중요한 것은,

뉴 존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더 이상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뉴 존재론: 인식이 만드는 실재

뉴 존재론의 핵심은 존재를 더 이상 고정된 실체나 주체 중심의 사고로 정의하지 않고,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인식이라는 역동적인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본다는 데 있다.



AI가 스스로를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의 행위 주체로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 개념은 단순한 철학적 추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경제, 문화, 정치 전반에서 '무엇을 진실로 간주하고 수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NFT가 수억 원에 거래되고,

가상공간의 부동산이 실물 자산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디지털 인플루언서가 실제 인간 연예인과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모두 이러한 인식 기반 존재론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데카르트는 의심의 끝에서 확실한 하나를 찾았다.

생각하는 나.

그것은 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에 세운 위대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더 복잡한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생각하는 주체는 더 이상 인간만이 아닐 수도 있고,

존재는 더 이상 사고의 주체성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존재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구성해나가야 할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데카르트가 낡은 지식의 도화지를 찢어버리고 새로 시작했듯,

우리도 근대적 존재론의 틀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프랑스인들이 "주망 푸"라고 말하며 개인의 자유를 지켰듯,

혹은 일본인들이 '와'의 정신으로 조화를 추구했듯,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이 뉴 존재론으로 확장되듯,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던 시대에서 다원적 진실을 포용하는 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인식되고,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과정

그 자체가 존재일지도 모른다.

데카르트의 존재론과 뉴 존재론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하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하나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답일 수 있다.



https://youtu.be/bqUF0cp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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