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2019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아내 정의자를 엄마로 불렀다.
알츠하이머로 투병생활의 끝자락에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엄마, 돈 천만 원만 줘. 다시 사업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돈 좀 가져와. 사업해야지."
기억은 흐렸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김우중 회장의 사업에 대한 본능만은 숨길 수 없었다.
세계를 무대로 365일 중 200일을 해외에서 보내며 대우 그룹을 일궜던 사람이,
그렇게 마지막은 슬펐다.
결혼 생활 55년 중 함께 보낸 시간이 20년은 될까.
정의자는 그렇게 회고했다.
죽기 전 1년 동안 병원에 있을 때가 제일 오래 함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그들의 첫 만남은 1960년대 초, 친구의 백일 잔치 자리였다.
잔치를 마치고 나서는데 친구 남편의 동창이 정의자를 불러세웠다.
직장을 다니던 샐러리맨 청년 김우중이었다.
그는 대뜸 그녀에게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정의자는 단호히 거절했다.
작은 키에 안경을 끼고 있던 그 청년.
안경 속 눈매와 얼굴은 예뻤지만,
그녀는 결혼보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 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꾸며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친구 남편이 설득에 나섰다.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과를 나온 엘리트예요.
한 번만 더 만나봐요. 내 얼굴을 봐서라도."
할 수 없이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1964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함께 유학을 가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67년, 정의자는 장남 김선재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다가 가출을 감행했다.
남편이 친구와 동업으로 회사를 차린다며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얼마나 힘든 건지 알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시집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김우중은 마음을 돌리지 않았고,
2주 만에 정의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곧 김우중은 자본금 500만 원을 가지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 그룹의 출발이었다.
10년이 지난 1975년,
김우중은 마침내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막내 김선용이 겨우 두 살 때, 정의자는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 대학에서 1년 반 동안 동양 미술사를 공부했고,
귀국 후에도 경영대학원을 섭렵하며 꾸준히 자신의 지적 갈증을 채워나갔다.
1982년, 서울 힐튼 호텔 회장에 취임하면서
정의자의 본격적인 미술 후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호텔 로비에 미술품을 전시한다는 것은 낯선 개념이었다.
오히려 작가들 사이에서는 "호텔에 웬 미술품이냐"며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반발이 컸다.
하지만 정의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해외에서 호텔을 세울 때마다 예술가들을 찾아 지원하고
그들의 그림을 호텔에 걸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선견지명이 증명되었다.
지금은 고급 호텔 로비에 미술품을 전시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그 시작점에 정의자가 있었다.
1990년,
정의자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비극이 찾아왔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공부하던 장남 김선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뉴욕 출장을 가는 어머니를 마중 나가던 길에 일어난 사고였다.
비닐 천막에서 1년 반을 지내며 아들의 무덤 앞에서 식사를 하던 그녀는,
아픔을 승화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1991년,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고등학교까지 다닌 경주에 미술관을 세웠다.
아들의 이름을 딴 '경주선재미술관'이었다.
"천년고도 경주를 현대 미술과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경주에 박물관이 많은 만큼 현대 미술관을 설립하면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개관식 날, 김우중 회장은 아들이 그리워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한창 바쁘던 때라 가슴 아플 사이도 없이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달리려고 했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국내 현대 미술 컬렉션에서 정의자는
삼성가의 홍라희와 쌍벽을 이루던 미술계의 큰손이었다.
두 집안은 종종 묘한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1998년, 정의자가 서울에 아트선재센터를 열고 개막식에
당시 대통령 영부인 이희호를 초청하자,
삼성 쪽에서도 일주일 뒤 이희호를 초청해 조선 후기 국보전 개막식을 치렀다.
한국 재벌가의 미술 후원 경쟁은 그 자체로 한국 미술계의 성장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정의자의 미술 사랑은 영화계로도 이어졌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때 선재상을 만드는 등 오랜 시간 영화계를 지원해왔다.
그녀의 아들 김선용은 영화 '추격자'의 대성공 이후 영화 배급 사업에도 뛰어들며
국내 영화계의 성장을 이끌었다.
정의자의 문화예술 DNA는 딸 김선정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딸이 어릴 때부터 손을 잡고 미술관에 함께 다녔어요.
원로 작가들의 집을 자주 방문해서 보고 들은 게
딸이 미술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김선정은 광주비엔날레의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심사위원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해외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국내 예술인 가운데 1위에 오를 정도로 주목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2012년,
정의자는 국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제2회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 대상을 수상했다.
이는 몽블랑 문화재단이 문화예술 후원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권위 있는 상으로,
아트선재센터를 운영하며 한국의 현대 미술 분야를 후원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1999년 대우 그룹이 해체되면서 힐튼 호텔도,
경주선재미술관도, 모든 것이 채권단에 넘어갔다.
아들이 안치되었던 안산 농장마저 잃으면서 정의자는 선재를 화장시켜야 했다.
하지만 정의자가 한국 미술계에 남긴 족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호텔 로비를 미술 전시 공간으로 바꾼 선구자,
아들의 이름으로 현대 미술관을 세운 어머니,
딸에게 미술의 길을 열어준 멘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의 철학이 사업에서 펼쳐졌다면,
정의자의 철학은 문화예술의 장에서 꽃피웠다.
결혼 생활 55년 중 함께한 시간은 2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