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의 일생

재미난 이야기

by 제임스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부모의 손을 놓고 궁궐 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 아이의 인생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공노비의 딸로 태어난 이들은 친척 상궁의 손에 이끌려 붉은 담장 안으로 들어서며,

평생을 궁궐에 바치는 삶을 시작했다.


궁녀(宮女)는 옛 한국에서 제왕과 그 가족을 시종하거나

궁의 행정 관리 혹은 실무를 담당하였던 여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내명부에 속한 실무직으로 정 5품 상궁(尙宮)부터

종 9품 주변궁(奏變宮)까지의 품계를 받았다.

후궁(後宮)이 될 경우 정 1품 빈(嬪)부터 종 4품 숙원(淑媛)의 품계가 내려진다.

궁녀의 일종으로 비자, 무수리, 각심이, 방자, 의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상궁, 나인의 시중을 들거나 궐의 하찮은 일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품계도 받지 못했고 대우 또한 일반 궁녀들에 비해 매우 좋지 않았다.


궁녀이자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


입궁의 첫 관문은 처녀 감별이었다.

앵무새 피를 팔목에 떨어뜨려 흘러내리지 않아야만 궁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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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묘한 의식을 통과한 소녀들은 '생각시'라 불리며 선배 궁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글과 소학을 배우고, 궁중 예법과 업무를 익히는 도제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규율은 엄격했다.

왕과 왕비를 모시는 궁녀는 방귀조차 함부로 낄 수 없었고,

실수하면 부모가 음식을 준비해 와 사죄해야 했다.

섣달 그믐에는 '취불이 근력'이라는 신고식을 치렀다.

말조심을 가르치고 잡귀를 쫓는다는 명목의 이 의식은 어린 생각시들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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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의 수련 끝에 계례식을 치르면 비로소 정식 궁녀인 '나인'이 되었다.

머리에 비녀를 꽂는 순간, 소녀는 궁궐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나인들은 두세 명이 한 방을 쓰며 20년 넘게 함께 지냈다.

방동무로 불린 이 동료들은 가족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근무는 격일제가 일반적이었지만, 지밀 나인들은 달랐다.

왕의 침전을 지키는 이들은 12시간씩 3교대로 밤을 새웠다.

왕이 누구와 밤을 보내는지는 국가 최고 기밀이었고,

그 비밀을 지키는 것이 지밀 나인의 숙명이었다.


궁궐에는 궁녀를 위한 목욕탕도, 화장실도 없었다.

세숫대야와 요강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월급은 꽤 괜찮았다.

노동 강도와 품계에 따라 달랐지만, 상여금까지 받으면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여가 시간에는 바느질을 하거나 글씨를 연습했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려면 선배 상궁 앞에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지칠 때까지 피워 보이고 나서야 맞담배를 나눌 수 있었다.



외출은 엄격히 제한되었으나, 월급을 받으면 가끔 친정을 다녀올 수 있었다.

출입패를 받아 잠시 궁궐 밖 세상을 맛보는 순간이 유일한 자유였다.


궁녀들의 사랑은 비극이었다.

별감이나 환관과 연애하다 임신하면 출산과 동시에 사형당했다.

같은 여인끼리의 사랑도 금기였다.

가뭄이 들면 결혼하지 못한 여인들의 한을 풀어준다며 출궁시키기도 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승진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생각시 10년, 나인 후 25년에서 35년을 더 버티면 겨우 상궁이 될 수 있었다.

정1품 벼슬을 받은 제조상궁은 막대한 권력과 부를 누렸다.

그 자리를 얻으려 환관이나 대신들과 결탁하기도 했다.

어떤 상궁은 만 평이 넘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궁녀의 운명은 상전의 운명에 묶여 있었다.

상전이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출궁해야 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다가, 동료들과 함께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죽으면 동료들이 화장하여 산이나 절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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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왕조와 함께한 궁녀들.

그들은 화려한 궁중 문화의 산 증인이자, 붉은 담장 안에 갇힌 새들이었다.

궁궐의 불빛이 꺼진 지금,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 희미한 메아리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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