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미술 시장에서 '제2의 존 커린'이라 불리는
캐나다 화가 안나 웨이언트(Anna Weyant, 1995-)의
그림 앞에 서면, 묘한 시간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녀의 캔버스 속 인물들은 분명 현대를 살아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19세기 어느 저택의 응접실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웨이언트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을 졸업한 후
2017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대표작 <Summertime>은
여름이라는 이름과 달리, 햇빛 아래 드리운 고요한 그림자를 품고 있다.
탁자에 머리를 기댄 인물의 자세는 휴식이 아니라 멈춤에 가깝고,
밝은 색조 속에서도 마음의 온도는 낮다.
이 그림은 계절이 아니라 감정의 한 순간을 붙잡는다.
뜨겁게 빛나야 할 여름이, 여기서는 조용히 식어가는 마음의 계절로 남는다.
계산적인가. 이 모호함이야말로 웨이언트 회화의 핵심이다.
그녀는 고전 회화의 형식 속에 현대적 고독과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그녀의 회화는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그 안에는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Falling Woman>에서는 낙하하는 여성의 모습이 마치 꿈속 장면처럼 펼쳐진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드레스의 주름, 공중에 떠 있는 머리카락 -
이것은 추락인가, 부유인가.
그녀의 그림에는 서늘한 고전주의와 불안한 초현실주의가 공존한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연상시키는 직접적인 시선, 발튀스의 불편한 긴장감,
그리고 현대 포토그래피의 스냅샷 같은 순간성이 한 화면에 녹아든다.
색채는 절제되어 있다.
차가운 회색빛 배경, 상아색 피부,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선명한 빨강 - 체리, 입술, 꽃잎.
Loose Screw는 바에서 혼자 와인잔을 앞에 두고
크게 웃고 있는 외로운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인물이 다소 절박하고, 외롭고,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일종의 자화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작품의 제목은 에미넴의 "The Real Slim Shady" 가사
"머릿속 나사 몇 개가 풀린 것 같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구도는 오토 딕스(Otto Dix)의 1921년 작품 'Woman With A Red Hat'를 기반으로 했으며,
오른쪽의 기둥은 또 다른 인물을 대신하는 유머러스한 장치로,
자기격리 시대의 대화가 어떤 모습인지 반영한다.
이 작품은팬데믹 시대 인간의 두려움, 절망, 고립, 무지, 공격성을 다루고 있다.
웨이언트 특유의 어둡고 유머러스한 비극적 서사가 완벽하게 구현된 대표작이다.
그녀의 작품이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유는,
우리가 흔히 '순수'와 '위험', '소녀'와 '여성' 사이에 그어놓은 선을 계속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웨이언트는 질문한다.
응시당하는 여성은 피해자인가, 주체인가?
그녀의 초현실주의는 달리나 마그리트처럼 환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일상 속에 잠복한 낯섦, 익숙한 것의 불안을 포착한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웨이언트.
그녀의 그림은 클래식한 기법으로 현대의 불안을 그린다.
마치 오래된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처럼,
아름답지만 조금 일그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