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주절주절

by 제임스

아침 신문을 펼치다 한 기사에 눈길이 멈췄다.

현대차 노조가 로봇 투입을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사합의 없이 로봇 한 대도 생산 현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

그리고 "판을 엎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테슬라와 BMW가 로봇 기술 도입으로 초단위 경쟁을 벌이는 시대에,

한국의 대표 기업 노조는 '로봇 쇄국'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내게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노조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노동자를 위한 조직이 왜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노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숭고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하루 15시간 노동, 먼지 가득한 다락방 작업장,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할 수 없었던 어린 시다들.

전태일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노동조합은 자본의 횡포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방패였고,

부당한 처우에 맞서는 투쟁의 거점이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희망이었다.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약자였던 노동자가 사용자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노조의 존재 이유는 명확했다.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인간다운 노동환경을 만드는 것.

이것이 노조가 태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일부 대기업 노조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급성장한 대기업 노조들은

강력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높은 임금과 고용안정을 확보했다.

문제는 이들이 확보한 기득권이 점차 특권으로 변해갔다는 점이다.


현대차를 비롯한 일부 대기업 노조 조합원들의 평균 연봉은 1억 원을 넘어섰다.

이는 같은 업종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의 4배에 달한다.

고용 역시 철옹성 같았다.

정리해고는 거의 불가능했고, 오히려 정년연장을 요구하며 신규 채용을 막았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는 동안,

이들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가두리'를 쳤다.

더 심각한 문제는 채용 비리였다.

2018년 드러난 현대차 채용 비리는 충격적이었다.

노조 간부들이 자녀와 친인척을 특혜 채용하는 관행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현대차 생산직 채용자 중 상당수가 임직원 자녀였다.

능력이 아닌 혈연으로 일자리가 세습되는 동안,

정작 일자리가 필요한 청년들은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생산성과 무관한 과도한 임금 인상 요구, 사소한 이유로 반복되는 파업,

회사의 경영 위기 상황에서도 양보 없는 강경 투쟁.

이런 모습들이 쌓이며 '귀족노조'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노조는 더 이상 약자의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려는 또 하나의 특권층이 되어버렸다.




국민들이 노조에 등을 돌린 이유는 명확하다.

노조가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 전체에 피해를 주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철도 노조의 파업으로 귀성길이 막히고,

화물연대 파업으로 물류가 마비되며,

의사 집단행동으로 응급환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노조의 변질은 제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육 현장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일명 전교조는 1989년 교사들의 권익 보호와

참교육 실현을 목표로 출범했다.

초기에는 권위주의 교육 현장을 개선하고 교권을 보호하려는 순수한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교조 역시 시간이 지나며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을 정치화했다는 점이다.

전교조는 교실에서 특정 이념을 주입하고,

학생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며,

교육과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편향된 내용을 가르치는 사례들로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며 국민들은 노조를 '공공의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파업의 목적이 노동조건 개선이 아니라 기득권 지키기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특히 자녀 특혜 채용 문제는 공정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분노를 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노조 간부 자녀들의 '금수저 입사'는 용납할 수 없는 불공정이었다.

"로봇으로 노조로 만들라, 그것이 진정한 금속노조"라는

청년들의 자조 섞인 비판은 노조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현대차 노조의 로봇 투입 반대는 이런 맥락에서 더욱 비판받는다.

전 세계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술혁신에 매진하는 동안,

한국의 노조는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기계를 거부하고 있다.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는 우려는 이해하지만,

무조건적인 거부는 답이 아니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모두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


노조가 사회악이 되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조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지키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청년 구직자까지

아우르는 연대의식이 필요하다.



기술 혁신에 대한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로봇 도입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기술 변화에 따른 노동자 재교육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독일의 노사정 협의처럼, 기술 발전과 고용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법과 제도 개선도 시급하다.

과도한 파업권 남용을 제한하고,

필수 공공서비스의 경우 최소 운영을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노조 간부의 채용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임금 인상이 생산성 향상과 연계되도록 하는 제도적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재 논란이 되는 노란봉투법 역시 무제한 파업권 보장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자 보호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노조는 원래 약자를 위해 태어났다.

전태일 열사가 꿈꿨던 것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었지,

특권층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노조가 다시 존경받으려면,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공정한 룰 안에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노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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