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절을 앞두고

일상 속으로

by 제임스

설날이 다가오면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차례상 준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2026년 설 차례를 지내겠다는 응답이 48.5%에 그쳤다는 조사 결과는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역대 최고치에 달한 차례상 비용 부담 속에서,

명절의 의미를 지키려는 이들과 그 짐을 내려놓은

이들이 공존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차례(茶禮)는 본래 조상에게 차를 올리는 의례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 『가례』의 참례(參禮)와 천신례(薦新禮)가 오늘날 차례의 기원이다.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조상에게 알리고,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먼저 올려 조상의 음덕을 바라는 의식이었다.

설날 아침 차례상에 오르는 떡국은 새해의 밝음을 상징하는 흰떡으로,

둥근 모양은 태양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조상과 후손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하고,

조상이 드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일체가 되기를 바랐던

선조들의 마음이 담긴 의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차례의 모습은 변해왔다.

일제강점기 양력설 강요, 광복 후 이중과세 논란을 거쳐,

1989년에야 음력설이 공식 명절로 인정받았다.

그 과정에서 차례 또한 간소화의 길을 걸었다.

성균관은 2022년부터 차례상 간소화를 추진하며

떡국, 나물, 구이, 과일 등 10가지 정도의 음식만 올리자고 제안했다.

튀김과 전을 생략하고, 조율이시(棗栗梨柿) 같은 엄격한 규칙보다는

가족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방향이었다.




현실은 더욱 복잡하다.

고물가 시대에 전통시장을 뒤지며 제철 과일을 골라 소분 구매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아예 차례를 포기하고 해외여행을 선택하는 가정도 늘었다.

2026년 설날 연휴 해외 항공권 예약이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통계는

명절 풍경의 변화를 입증한다.

차례용 농산물 구매는 줄이고 가족이 먹을 일반 농산물 구매는

늘리겠다는 응답도 주목할 만하다.


"조상 덕 본 사람은 이미 해외로 놀러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례를 지낸다"는 말이 시중에 떠돈다.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이 말은 나름 의미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의 핵심은 단순한 경제력 차이가 아니다.

조상에게 차례상을 차려 놓고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소용없다는,

냉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깨달음을 담고 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산타를 기다리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아침 양말 속 선물은 산타가 아니라

부모가 준비한 것임을 알게 된 순간,

그 설렘과 기대는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해도 조상의 가호가

특별히 더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세대에게,

차례는 더 이상 경건한 의식이 아니라 관성적인 형식으로 보일 수 있다.

이런 영향이 차례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아닐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긴 연휴를 활용해 가족 여행을 떠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차례 준비의 부담을 짊어진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차례가 정말 조상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것인가?


차례의 본질은 형식에 있지 않다.

화려한 상차림이나 복잡한 절차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 함께 모여 조상을 기억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 시간이다.


설문에서는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이 56.4%에 달했지만,

여전히 43.7%는 차례를 지킨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무엇일까?

조상이 실제로 차례상의 음식을 드시고 복을 내려준다고 믿어서일까.

아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실존하지 않아도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듯이,

차례 또한 초자연적 믿음과는 별개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분이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시간이며,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뿌리를 되새기는 계기다.


차례상 앞에 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누군가는 준비의 고됨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고인을 그리워하며,

또 누군가는 형식적인 절차에 회의를 품는다.

조상이 정말 이 음식을 드실까,

내 절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이 모여 한 해의 시작을 함께 맞이한다는 것,

의심 속에서도 모이기로 선택한다는 것,

그것이 차례가 가진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산타할아버지는 없어도 크리스마스가 남듯이,

차례 또한 초월적 믿음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는 달라져야 한다.

조상의 가호를 바라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후손이며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정체성의 의식으로 말이다.

비용 부담과 세대 간 갈등, 변화하는 가치관 속에서도 차례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과 연결되고 싶은가라고.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새해의 바람처럼,

차례 또한 시대에 맞춰 그 모습을 바꿔갈 것이다.

중요한 건 형식의 완벽함도, 맹목적인 믿음도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진정성이다.

조상 덕을 봤든 보지 못했든,

해외로 떠나든 차례상 앞에 서든,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설날이 되기를 바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차례를 지내든 지내지 않든, 그것은 각자가 내린 선택이며,

어느 쪽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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