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으로
설날 아침, 온 집안이 분주하다. 차례상을 차리는 소리, 부침개 지지는 냄새,
그리고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뒤섞인다.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맛있는 음식만이 아니다.
정갈한 한복을 입고 큰절을 올린 뒤 받게 될 세뱃돈이 그들의 마음 한편을 설레게 한다.
나역시 어릴 적 설날은 세뱃돈 받는 날이었다.
설 전날 밤이면 잠자리에 누워 내일 받을 돈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곤 했다.
할머니 댁에서 얼마, 큰집 삼촌께 얼마, 작은집에서 얼마.
그렇게 더해지는 숫자만큼 새해가 풍요롭게 느껴졌었다.
세뱃돈은 새해 첫날 어른에게 세배를 드린 뒤 받는 돈을 말한다.
'세배'는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하며 웃어른께 드리는 절이고,
어른들은 그 정성에 대한 답례이자 새해 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돈이나 선물을 건넨다.
이 풍습의 정확한 기원은 알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문헌에도 설날에 아이들이 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덕담과 함께 무언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옛날에는 현금보다는 떡이나 엿, 작은 물건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세뱃돈이 현금 중심으로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뱃돈의 본질은 금액이 아니라 축복이다.
어른이 아이의 건강과 학업을 기원하며 건네는 마음, 그 상징이 작은 봉투에 담긴다.
그래서 할머니는 만 원 한 장을 주시면서도 "공부 열심히 하거라" 하는
당부를 빼놓지 않으시고,
삼촌은 오만 원을 주며 "올해는 키가 쑥쑥 크렴" 하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돈의 액면가를 넘어선 애정과 기대가 그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위치가 바뀌었다.
주는 입장이 되니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본가와 처가를 합치면 조카만 스무 명이다.
그나마 취업하고 결혼한 조카들을 빼면 반으로 줄지만, 그래도 열 명이다.
요즘 중·고등학생이 받는 세뱃돈 평균은 7만 4천 원가량이라고 한다.
미취학 아동에게는 1만~2만 원, 초등학생은 3만~5만 원,
대학생은 10만 원 수준이 암묵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금액 자체가 아니다.
많이 주고 싶어도 다른 집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보통 10만 원 정도를 주고 싶지만,
막내 처제네는 형편이 어려워 만 원조차 부담스러워한다.
내가 주고 싶은 대로 준다면 막내 동서와 처제는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내 생각대로 양가 부모님께 각각 30만 원,
조카들에게까지 생각하면 합계가 백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세후 월급 300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라면 월 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명절 하루에 지출되는 셈이다.
“처가댁에 가면 어린 조카들이 대학생 4명,고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초등생 4명입니다.
수십만원이 순식간에 나갑니다.
세배하는데 절 받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절 받을 때 마음이 기뻐야하는데 너무 너무 싫어요.”(네이버 아이디 ikm9****)
“명절에 양가 부모님 용돈에 선물비만 해도 벅찬데
양가 조카들 세뱃돈까지 정말 부담된다.
빠듯한 살림에 명절이 정말 싫다.
형편껏 할래도 세뱃돈 액수에 관심뿐인 조카들도 안보고 싶다. ㅠㅠ”(dep5****)
이렇게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곡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고민 끝에 형제자매들과 사전에 상의하여 세뱃돈을 결정하기로 했다.
조카 나이와 상관없이 무조건 3만 원.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명절은 빚내서 치르는 행사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여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자리여야 하니까.
그런데 막상 봉투를 건네는 손이 부끄러울 것 같다.
대학생 조카 입에선 '큰 이모부가 좀 짜네'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다.
매년 이런 고민을 하는 상황이 싫다.
이 순간만큼은 어린 시절 설레던 나 자신과 지금의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실감한다.
곤혹스러운 세뱃돈.
내년에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세뱃돈을 금융 교육의 기회로 삼는 가정도 늘고 있다.
아이 명의 통장에 세뱃돈을 모아주고,
만 14세가 되면 청약통장을 만들어 꾸준히 납입하게 하거나,
소액으로 ETF를 사보게 하는 식이다.
12년간 모은 90만 원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아이가 돈의 흐름과 자산의 개념을 배우는 데는 충분하다.
다만 부모가 정기적으로 큰 금액을 같은 통장에 넣으면 증여로 간주될 수 있으니,
출처를 기록해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적정한 세뱃돈이란 결국 무엇일까. 통계나 평균보다 중요한 것은
주는 사람의 형편과 받는 사람의 관계다.
부담 없이 줄 수 있는 선에서, 진심 어린 덕담과 함께 건네는 것.
그것이 세뱃돈 본래의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봉투를 열어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기대와 설렘이 어린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함께 나눈 이야기와 웃음이다.
세뱃돈은 금액이 아니라 관계의 매개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그 마음이,
한 장 한 장 접힌 지폐 사이로 전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