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선 위로 흐르는 현대의 산수

황소형

by 제임스

전통적인 ‘동양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힘찬 붓질이 느껴지는

검은 먹선과 여백의 미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98년생의 젊은 예술가 황소형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가 가진 동양화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내 기분 좋게 무너져 내린다.

그의 화면은 비어 있지 않다.

대신 빽빽한 산세와 압도적인 디테일,

그리고 숨 쉬는 듯한 현대적인 색채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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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형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작가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선을 그어 형태를 가두는 대신,

색을 먼저 채우고 선이 지나가야 할 자리를 하얗게 남겨둔다.

이를 ‘비워진 선’이라 부른다.


전통 동양화의 강한 먹선이 자연의 미묘한 떨림을 방해한다고 느꼈던 작가는

선을 긋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경계를 흐리고,

관객이 그 흐릿한 틈 사이로 기꺼이 길을 잃게 만든다.

이 비워진 선들은 색과 색 사이에서 공기의 흐름이 되고,

자연이 내뱉는 숨결이 되어 우리를 작품 깊숙이 몰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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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구현하는 색채 또한 경이롭다.

그는 광목천 위에 마른 붓질을 수없이 반복하며 색을 쌓아 올린다.

언뜻 보면 하나의 푸른빛 혹은 초록빛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안에는 미묘하게 다른 농도와 결을 가진 수만 가지의 색이 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정성스러운 적층의 과정은 자연의 거대함을 캔버스라는 작은 틀 안에

압축하려는 작가의 치열한 고민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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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자연을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한 ‘시가도(視架圖)’ 시리즈다.

과거 선비들이 책가도에 지식을 보관했듯,

작가는 거대한 자연을 조각내고 압축하여 책장에 꽂아 넣는 형식을 취한다.

이는 자연과 멀어진 현대인들이 자신의 작은 방 안에서도 자연을 소유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따뜻한 시선이 담긴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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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우리에게 세 가지 거리에서의 감상을 제안한다.

3미터 밖에서 전체의 구조를 보고, 1미터에서 리듬을 느끼며,

30센티미터 앞에서 미세한 색의 결을 마주하는 것.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복잡한 미로 같았던 자연의 형상은 어느덧 내 마음의 소란을 잠재우는 안식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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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형의 산수는 단순히 풍경을 옮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불안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갈피’를 찾아주려는 예술적 위로이다.

비워진 선을 따라 길을 잃다 보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전통의 맥을 잇는 그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왜 다시 ‘동양화’를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국악명상음악

https://youtu.be/Rvo8jL7Jbjw?si=nTnxUY2WbKBw1g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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