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무는 틈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우리는 흔히 예술을 일컬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하지만 테일러 메이저의 작업 방식은 오히려 ‘유'에서 '유'를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는 화려한 색채를 채워 넣는 대신,

겹겹이 쌓인 어둠을 걷어냄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빛’을 구출해낸다.


Cap 2026-02-19 19-19-45.jpg 정면, 2024


처음 마주한 그의 캔버스는 그저 적막한 어둠이 깔린 낡은 거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정교하게 붙여두었던 테이프를 한 장씩 떼어내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날카로운 칼 끝을 따라 테이프가 벗겨진 자리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텅 빈 방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빛의 줄기는 평면이었던 종이를

순식간에 깊이 있는 공간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이 경이로운 착시의 이면에는 작가의 치밀하고도 고독한 계산이 숨어 있다.

빛이 벽면에 닿아 굴절되는 각도,

바닥의 질감에 따라 미세하게 번지는 반사광,

그리고 물체가 빛을 등질 때 생겨나는 그림자의 꺾임까지.


그는 단 하나의 색도 섞지 않은 채 오로지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만으로 이 모든 디테일을 설계한다.

마치 한 편의 흑백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빛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Cap 2026-02-19 19-28-53.jpg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창가의 햇살이나 복도의 그림자가

얼마나 정교한 예술적 산물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의 어둠 또한 그저 아직 떼어내지 못한 테이프에 가려진 빛일지도 모른다.

테일러 메이저가 테이프를 뜯어내어 공간의 생명력을 불어넣듯,

우리도 마음속의 고정관념이라는 테이프를 한 장씩 걷어낼 때

비로소 진정한 내면의 빛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공간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빛이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가 된다.

흑백의 차가운 대비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설계한 것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빛이라는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Cap 2026-02-19 19-27-46.jpg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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