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힘 읽는 밤
제프 라슨(Jeffrey T. Larson)의 그림을 보면,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빨랫줄에 늘어선 옷가지들,
나무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빵 덩어리들,
강물 속을 첨벙이는 아이의 발. 누구나 스쳐 지나쳤을 풍경들이다.
그런데 잠시 멈추어 바라보면, 그 평범함 안에 뭔가 깊은 것이 가라앉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오래된 집의 뒷마당에서 문득 황금빛 오후를 마주했을 때처럼,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그 감각...
라슨은 1962년 미네소타 주 투 하버스에서 태어나 애틀리에 랙(Atelier Lack)에서
올드 마스터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그의 스승 리처드 랙은 20세기 추상미술의 물결 속에서도
묵묵히 재현 미술의 기초를 고집했던 인물이었다.
라슨은 그 훈련 위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얹었다.
아카데믹한 정밀함을 바탕으로 하되,
인상주의의 빛 감각을 녹여넣어 딱딱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의 정수는 빛에 있다.
《Clothesline Conversation》에서 빨랫줄에 걸린 흰 시트와
형형색색의 옷들은 단순한 직물이 아니다.
역광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천들은 그 자체로 빛의 악보가 된다.
차가운 보랏빛 그림자, 따뜻한 황금빛 반사광,
대기 속에 녹아드는 윤곽선들이 서로 속삭이듯 어우러진다.
빨래를 너는 행위가 이토록 시적일 수 있다는 것을 라슨은 캔버스 위에서 증명한다.
《Bread Rack》은 또 다른 차원의 경이로움이다.
가로 세로 150센티미터가 넘는 대형 화면 위에 빵들이 가득 들어찰 때,
우리는 그것이 단지 식재료가 아님을 깨닫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의 질감, 불규칙하게 갈라진 표면,
밀가루와 시간이 빚어낸 형태들.
라슨은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개월을 쏟았다고 한다.
그 정성이 화면 전체에 배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빵 냄새를 맡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다.
《Inner Child》에서 강물 속을 걷는 아이의 실루엣은 거의 역광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얼굴도, 세부 표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아이가 느끼는 것을 안다.
발바닥에 닿는 물의 차가움, 물결이 무릎을 간질이는 감각, 온몸으로 여름을 받아들이는 그 황홀함.
형태보다 빛으로, 묘사보다 감각으로 전달하는 라슨의 능력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다.
라슨의 그림이 우리를 움직이는 까닭은 향수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것들 속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기어코 찾아내어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간청이다.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만 더 깊이 바라보라고. 빛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