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이페이의 식물 콜라주 예술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뉴이페이의 작품을 처음 본 건 나른한 오후였다.

스마트폰 속, 이끼로 만든 공작이 숲 바닥에서 꼬리를 펼치고 있었다.

그 선연한 초록은 봄나무에서 갓 빌려온 듯 이슬과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바라보자 어린 시절 시골 외할머니 집이 떠올랐다.


우리도 낙엽으로 나비를, 돌로 물고기를 만들곤 했다.

그 자연과의 놀이를 잊고 살았다.

뉴이페이는 그 원초적 창작 충동을 기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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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산골 출신 서른다섯 화가는 캔버스를 숲속 땅바닥에 펼친다.

재료는 화방의 물감이 아니라 산에서 주운 낙엽, 솔잎, 이끼, 나뭇가지다.

작업실엔 벽도 지붕도 없다.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살과 가끔 스치는 동네 주민들만 있을 뿐이다.


그의 손에서 마른 잎은 사자의 갈기가 되고 솔잎은 용의 비늘이 되며,

이끼는 공작의 화려한 꽁지깃이 된다.

자연으로 자연을 재현하고 만물로 만물을 되살린다.

이는 '외사조화, 득중심원'의 옛 화론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을 붓 삼아 조화 자체를 화폭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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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은 고향 숲의 솔껍질과 솔잎으로 만든 용이다.

소나무 결은 동양화 필치처럼 거칠고 소복하다.

동네 어르신들이 '늙은 용 비늘', '늙은 용 수염'이라 부르는 토속어가 영감이 됐다.

진정한 예술은 땅에서 자라는 법이다. 농작물처럼, 들풀처럼.


그의 인생도 그림처럼 해체와 재조합을 겪었다.

애니메이션 전공, 부동산 중개인, 샌드아티스트, 실직 3년을 거쳐 산촌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식물로 '애니메이션 찍던' 순수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간신히 대학 보내 산을 벗어나길 바랐는데,

이십 년 만에 다시 산으로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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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은 더 나은 귀환을 위한 것,

멀어짐은 더 깊은 이해를 위한 것일까?

그가 산으로 가져온 건 도시 생활과 전문성만이 아니었다.

다시 '노는 법'을 아는 마음이었다.

버려진 공터에서 나뭇잎을 찾고, 무더위 속 닷새를 강가에서 돌악어를 만들고,

하루 종일 산을 헤매 특정 색깔 이끼를 찾았다.

이는 창작보다 자연과의 대화에 가깝다.


가장 인상적인 건 그의 작업 자세다.

그는 우뚝 선 예술가가 아니라, 땅에 몸을 낮춘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갤러리가 아니라 흙바닥, 나무뿌리 옆, 개울가에 있다.

한바탕 비가 몇 시간의 작업을 씻어내고, 강물이 닷새 만든 악어를 삼킨다.

그는 '보존'에 집착하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은 소장이 아니라 만남을 위한 것임을 아는 듯하다.

산나물이 피고 지는 것처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처럼.

찰나의 존재가 바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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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의 영상에 댓글을 남겼다.

"영상을 켜면 산속에서 크게 숨 쉰 것 같다."

디지털 이미지에 둘러싸인 시대,

우리는 이렇게 '숨 쉬게' 해주는 예술이 필요하다.

그의 작품은 요란하지 않고 취약하다.

결국 부패해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취약함이 오히려 무엇이 진짜이고 소중한지 일깨운다.


예술은 영원할 필요 없다. 진실하면 된다.

창작은 고고할 필요 없다. 친밀하면 된다.

그가 도시인에겐 쓰레기인 낙엽으로 그림을 재구성할 때,

그는 자연물만 재구성한 게 아니다. 우리와 자연의 관계,

현대에 단절된 감정까지 재구성했다.


다음에 산에 가면 나도 나뭇잎을 주워 그림 한 점 그리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그처럼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인사 한 번 건네고 싶다.




https://youtu.be/A8NxlOA-l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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