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과 신체 사이, 에이미 실만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에이미 실만(Amy Sillman, 1955– )은 구상과 추상 사이를 모호하게

오가는 과정 중심의 회화로 알려진 미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이다.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회화, 드로잉, 판화, 애니메이션, 진(zine) 제작, 글쓰기를 아우르며

어느 하나의 범주로 깔끔하게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실천을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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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만 회화의 핵심은 끊임없는 지우기와 다시 쌓기의 반복이다.

그는 붓 대신 주로 천, 흙손, 긁개 등의 도구를 사용해

캔버스 위의 물감을 밀고 걷어내며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 "비(非)그리기(unpainting)"의 방식은

추상표현주의의 선배 화가들인 드 쿠닝이나 거스턴과 비교되면서도,

그들과 구별되는 실만만의 '건설적 지우기'로 평가받는다.


실만은 엄격하면서도 유희적인 대형 유화 작업으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드로잉이야말로 자신의 실천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의 화면에는 인체의 흔적과 유머, 어색함, 불안이 공존하며,

잉크, 실크스크린, 과슈, 아크릴, 분필, 린넨,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넘나들며 만화적이고 유연한 선을 유지한다.


Cap 2026-03-04 17-05-11.jpg 덥 스탬프 , 2018


정치적 의식 또한 실만의 작업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제작된 《Dub Stamp》(2018) 연작은

선거 결과 충격 속에 땅을 기어가는 인물의 드로잉을 실크스크린으로 확대하고

그 위에 다시 채색한 것으로, 장난스러우면서도 폭력적인 이중성을 지닌다.

Cap 2026-03-04 17-03-35.jpg 덥 스탬프 2


실만은 현존하는 가장 비싼 여성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MoMA,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주요 기관의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Cap 2026-03-04 17-10-29.jpg


《U》(2008) — 실만의 경매 최고가 작품으로, 굵고 유동적인 형태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신체적 제스처와 추상이 맞닿는 지점에서 실만 특유의 긴장감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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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 Form》(2010년대)

실만의 중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두툼하고 팽팽한 형태들이 밝고 산뜻한 색채 위에 부유한다.

유머와 불안, 신체성이 한데 얽히며 실만의 회화 언어가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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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line》 연작(2018)

런던 캠든 아트 센터 전시작으로,

이중 면 종이 작업들이 갤러리를 가로지르는 줄에 자유롭게 매달려 설치된 대형 수평 연작이다.

인물, 제스처, 장면이 반복되지만 하나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으며,

추상적인 감정 상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가시화한다.


실만은 천재, 지배, 권력이라는 미술 담론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을 회화 속에 녹여내며,

유머, 어색함, 자기비하, 감정, 의심이라는 질들을 실천에 끌어들인다.

그의 작업은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던지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회화적 목소리 중 하나이다.



https://youtu.be/600Q3oY1Q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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