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산다는 것

그림 읽는 밤

by 제임스

벽이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이사를 마치고 텅 빈 거실에 서서,

혹은 오래 살아온 방의 흰 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순간 문득 그림 한 점을 걸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마음은 화랑 문 앞에서 번번이 멈추고 만다.

'비쌀 것 같아서', '잘 모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유리창 너머로 그림을 들여다보다 돌아선다.


Cap 2026-02-21 10-52-45.jpg


그러나 그림을 산다는 것이 정말 그렇게 먼 일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것들에 꽤 많은 돈을 쓰며 산다.

한 철 입고 마는 옷, 다음 날이면 기억도 희미한 술자리, 몇 주 지나면 지워지는 여행의 피로감.

그것들을 사는 데는 별 망설임이 없으면서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볼 수 있는 그림에는 왜 그리 인색한가?

어쩌면 우리가 그림 앞에서 주저하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안목에 대한 자신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대작을 살 필요는 없다.

판화나 사진 작품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복제품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한정된 에디션으로 제작된 판화는 엄연히 독립된 예술 작품이다.

일정 수량만 찍고 원본을 폐기하기도 하니,

오히려 희소성이 보장된 셈이다.


Cap 2026-02-21 11-00-10.jpg 박서보 작가의 '묘법(Ecriture) No.205'(믹소그라피아 판화, 55×77㎝, 2002)


유명 작가의 드로잉도 눈여겨볼 만하다.

수준 낮은 유화 한 점보다 작가의 개성이 살아 숨 쉬는 드로잉 한 장이

훨씬 소장 가치가 높을 수 있다.

서구의 수집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만 몰랐을 뿐이다.


그림 쇼핑에서 진짜 묘미는 아직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작가를 먼저 알아채는 일이다.

미래의 박수근, 이중섭이 될 작가의 작품을 지금 내 손으로 고른다는 상상은 설레는 일이다.

물론 그런 안목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화랑을 기웃거리고, 아트페어를 돌아다니고,

경매 카탈로그를 뒤적이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 지루한 반복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어떤 작품 앞에서 발이 멈추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좋은, 그 느낌을 믿으면 된다.


Cap 2026-02-21 11-03-13.jpg 박경률, 〈4:24〉, 2024. 캔버스에 밝게,


단, 몇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믿을 만한 화랑이나 경매 회사를 통해 거래하는 것,

가격이 일정 수준을 넘는다면 반드시 감정서를 요구하는 것.

위작 사건이 심심찮게 불거지는 세계에서 순진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작품의 제작 시기, 완성도, 희소성을 꼼꼼히 살피고,

화랑가와 경매 시장을 두루 돌며 적정 가격을 익히는 것이

결국 좋은 그림을 제값에 사는 지름길이다.


그림을 산다는 것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벽에 붙박아두는 일이다.

아침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 그림을 골랐는지를 떠올리는 일이고,

내 취향과 감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투자 수익이 따라온다면 물론 반갑겠지만,

그보다 먼저 그림은 나를 나에게 소개해준다.

비어 있던 벽 한 쪽이 채워지는 순간,

집이 비로소 나의 공간이 된다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이유가 된다.



78552_91857_1746.jpg 장재연, 히기에이아, 2025



Cap 2026-02-21 11-07-23.jpg 우민정, 사랑의 노동(labour of love)



https://youtu.be/BVBTpqwDIpM

매거진의 이전글모방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