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거인의 역할

주절주절

by 제임스

요즘 SNS를 들여다보면 묘한 사진 한 장이 떠돌아다닌다.

AI가 만들어낸 백만원권 지폐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얼굴이,

삼십만원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의 장난기 어린 창작물이지만,

그 안에는 한국 자본시장의 현실이 날카롭게 압축되어 있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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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역사는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병철 창업주가 수원에 작은 전자 공장을 세우며 시작된 이 회사는,

냉장고와 흑백 텔레비전을 만들던 기업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건희 선대 회장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절박한 선언은

삼성을 단순한 제조업체에서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재용 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법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도체와 AI 분야에 수십조 원을 투자하며 삼성의 미래를 밀어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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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의 여정은 더욱 극적이다. 1953년 선경직물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기업은 최종현 회장 시절 유공(현 SK에너지)을 인수하며 에너지 재벌로 도약했다.

그러나 진정한 도약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승부수는 SK를 대한민국 통신 산업의 심장부에 세워 놓았다.

최태원 회장 역시 횡령 혐의로 수감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출소 후 반도체 소재와 배터리, AI 인프라에 과감하게 투자하며

SK하이닉스를 삼성에 버금가는 메모리 반도체 강자로 키워냈다.

역경은 두 회사 모두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두 회사가 한국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수치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삼성전자는 단독으로 약 20~22%를 점유하고,

SK하이닉스가 약 7~8%를 더한다.

두 회사를 합치면 코스피 전체의 거의 30%에 육박한다.

지수가 오르내릴 때 사실상 두 종목이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자랑인 동시에 경고다.

두 회사의 성장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성취를 상징한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어떤 수식어로도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기적이다.

반도체 한 품목이 연간 수출의 20%를 넘게 책임지고,

협력사와 소재·부품 기업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온기는 수많은 가정의 밥상을 지탱한다.


그러나 지수의 30%를 두 종목이 책임진다는 현실은 다양성의 빈곤을 뜻한다.

코스피가 '반도체 지수'로 불리는 날이 많아질수록, 중소·중견 기업들은

투자자의 시선 밖으로 밀려난다.

주식시장의 양극화는 곧 산업 생태계의 양극화로 이어질 수 있다.


부디 두 거인의 실적이 지수판 위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막대한 영업이익이 협력사의 임금으로, 청년의 일자리로,

그리고 납세를 통해 국민 모두의 삶으로 스며들기를 바란다.

백만원권과 삼십만원권이 농담으로 떠도는 세상이지만,

그 농담이 자랑스러운 현실이 되려면

두 회사의 성공이 대한민국 전체의 성공이어야 한다.

거인의 발걸음이 클수록,

그 진동이 더 넓은 땅을 따뜻하게 흔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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