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겔리 미하일로비치 코르제프(Gely Mikhailovich Korzhev, 1925–2012)는
20세기 러시아 미술사에서 가장 진지하고 묵직한 이름 중 하나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수리코프 미술대학에서 세르게이 게라시모프의 지도 아래 수학한 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 안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 틀을 가장 진지하게 성찰한 화가가 되었다.
그의 예술적 전환점은 역사와 함께 찾아왔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유산을 공개 비판하는 연설을 하면서
소비에트 사회는 이른바 '해빙(Thaw)'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되었고,
이전 시대의 달콤하고 영웅적인 이상주의 대신 소비에트 삶의
냉정한 실상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것이 '엄격한 양식(Severe Style)'이다.
코르제프는 바로 이 운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엄격한 양식은 화려함을 거부한다.
세밀하고 장식적인 묘사 대신, 깎아낸 듯 간결한 형태와 절제된 색채,
그리고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한다.
코르제프의 캔버스 위 인간들은 영웅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겪고, 이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 코르제프는 깊은 존엄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대하고 엄숙한 화면 안에 가두어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고 이념이 청산되어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고집이라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코르제프가 평생 그린 인물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홀로 서 있는 사람들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화가는 결국 자신이 가장 반복해서 그린 인물을 닮아가는 법이다.
만년의 그는 돈키호테 연작을 통해 더 보편적인 질문을 던졌다.
믿음과 회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은,
소비에트라는 특수한 역사를 넘어 모든 시대의 이야기가 된다.
《호메로스》(Homer, 1960)
엄격한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초기 대표작으로, 눈먼 시인 호메로스의 형상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의 고독과 내면의 시선을 표현했다. 간결한 구성과 강렬한 존재감이 화면을 압도한다.
《공산주의자들》(Communists, 1957–60)
삶과 이념 사이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인물들을 담은 연작으로,
코르제프의 이름을 소비에트 미술사에 각인시킨 작품이다.
과장 없이 담담하게 그려진 인물들에서 오히려 더 깊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돈키호테의 의심》(Don Quixote's Doubt, 1994)
소련 붕괴 이후 발표된 만년의 역작으로,
방패를 든 채 망설이는 기사의 모습에 신념과 회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시대의 초상이 겹쳐진다.
엄격한 양식이 노년의 사색과 만난 코르제프 최후의 걸작 중 하나다.
겔리 코르제프는 이념의 화가였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의 화가였다.
그의 캔버스는 역사의 증언이면서 동시에,
어떤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조용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