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그림이 사진보다 더 사실적일 수 있을까?
데니스 페터슨(Denis Peterson, 1944~ )의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눈을 비비고, 다가가고, 그제야 이것이 붓으로 그린 그림임을 깨닫고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페터슨의 진짜 충격은 기술에 있지 않다.
그 놀라운 사실성이 봉사하는 대상, 즉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페터슨은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 슬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 할아버지는 클로드 모네의 가까운 제자였던 프레스코 화가였다.
인상파의 빛과 감성을 물려받은 소년은 결국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 석사 학위와 교수 펠로십을 받으며
포토리얼리즘의 선구자로 뉴욕 화단에 등장했고,
이후 포토리얼리즘을 넘어 자신만의 언어,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을 개척해냈다.
페터슨은 피사체의 심도, 색채, 구성을 사진과 다르게 세밀하게 조정함으로써
포토리얼리즘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발전시켰다.
사진처럼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각성된 메시지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극사실성을 활용한 것이다.
그에게 붓은 카메라가 아니라 발언대였다.
이 발언의 근원에는 그의 뿌리 깊은 개인사가 있다.
페터슨의 증조할머니는 오스만 투르크가 150만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생존자였다.
그 기억은 그의 피 속에 흘렀고, 결국 캔버스 위로 터져 나왔다.
그는 르완다 학살, 홈리스 문제, 소비사회의 계급 억압을 극사실의 화면으로 그려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자신이 이 주제를 즐겨 그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왜 누군가가 이 끔찍한 것들을 보려 하겠는가"라고 스스로 물었고,
지쳐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사명감이 공존하는 이 솔직한 고백은,
그의 그림보다 더 인간적이다.
페터슨의 그림 속 인물들은 영웅도 희생자도 아니다.
무겁고 거대한 광고판 아래 무감각하게 걸어가는 도시인들,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 그들은 단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극사실의 화면 안에서 어떤 유명인의 초상화보다 당당하게 기록된다.
이것이 페터슨이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전하려 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기술은 수단이고, 인간의 존엄이 목적이었다.
《Dust to Dust》
하이퍼리얼리즘 운동의 출발점을 알린 역사적 작품으로,
사회 최하층에 사는 무명의 남성을 정면으로 포착했다.
어떤 유명인 못지않게 그의 얼굴이 기록될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자,
하이퍼리얼리즘이 단순한 기술적 과시가 아닌 사회적 발언임을 증명한 작품이다.
신문지로 엉킨 옷자락 하나하나, 피부의 주름과 땀방울,
손에 쥔 'Wild Irish Rose' 병의 라벨 글씨까지 초현실적으로 선명하다.
뉴욕 거리의 냉혹한 빈곤이 눈앞에 박힌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인간의 고독과 생존 본능은 묘하게 따뜻하게 다가온다.
화려한 VORNADO 건물과 대비되는 이 모습은 도시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찌른다.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잊을 수 없는 초상이다.
《Don't Shed No Tears》 (눈물 흘리지 마세요)
수단 다르푸르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주제로,
아프리카 남성의 고통스러운 클로즈업 초상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피부 주름, 눈물 자국, 손의 상처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사진처럼 보인다.
목적은 제노사이드의 잔인함을 알리고, 미국/서구의 개입을 촉구하며 인도주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Indiana in NY》
타임스퀘어 근처 뉴욕 거리에서 거대한 Indiana Jones(2008 개봉) 홍보 빌보드가
건물 전체를 휘감은 장면을 하이퍼리얼하게 그렸다.
불타는 해골과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의 강렬한 포스터가 압도적으로 크고 밝게 표현되어,
아래 버스·택시·행인들을 짓누르는 듯한 구성이다.
영화 광고의 화려함과 소비주의가 도시민의 일상을 무겁게 지배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데니스 페터슨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의도된 불편함이다.
사진처럼 완벽한 화면 위에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눈을 마주쳐 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림이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페터슨은 붓으로 세상에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