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세계가 주목하는 컨템퍼러리 아티스트 줄리 머레투는1970년 에티오피아에서,
에티오피아인 지리학 교수 아버지와 유대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7년 정치적 혼란을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 미시간 주로 이주했고,
이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MFA 학위를 받았다.
대형 캔버스와 벽화 위에서 머레투는 잉크·연필·아크릴 물감을
겹겹이 쌓고, 지우고, 다시 덧바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 몸짓은 미래파의 역동성, 추상표현주의의 스케일과 물성,
알브레히트 뒤러의 선묘, 동양의 캘리그래피,
그래피티의 다양한 마크메이킹을 동시에 소환한다.
그녀는 도시가 기억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제작한다.
각 작품은 기하학적 구조에서 출발하며,
그 위에 건축 도면·지도·도시 사진을 투영해 전사한 후,
선과 형태의 폭풍이 캔버스를 가로지른다.
일부 마크는 최종 완성작에 남고, 일부는 희미한 유령처럼 사라진다.
바빌로니아의 석비에서 건축 스케치까지,
유럽 역사화에서 아프리카 해방 운동의 상징까지.
머레투는 인류 문명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서 형태를 끌어내 새로운 공명을 만들어낸다.
이주, 자본주의,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녀 예술의 핵심 주제다.
머레투의 작업 속도는 놀라울 만큼 느리다.
하나의 회화에 1년을 쏟아붓는 것이 이례적이지 않으며,
많은 작품은 건조하는 데만 수 주가 걸린다.
"어떤 그림은 빠르게 소비되도록 만들어진다.
하지만 어떤 그림은 느려진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그녀의 말은,
작품 앞에서의 침묵과 천착을 요구하는 그녀의 예술론을 압축한다.
Stadia II (스타디아 II, 2004)
카네기 국제전에 출품된 이 대형 회화는
경기장의 원형 구조를 기반으로 수천 개의 선과 기호가 폭발하듯 팽창하는 장면을 담는다.
건축 도면 위에 추상적 잉크 마크와 깃발·기업 로고를 연상시키는 색채 형태가 겹쳐지며,
인간의 감정·종교·자본이 도시의 구조 안에서 충돌하는 방식을 시각화한다. 집
단적 에너지가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이 화면 전체를 지배한다.
Mural (뮤럴, 2007–2010)
골드만삭스의 의뢰로 제작된 이 작품은 테니스 코트 크기에 달하는 대형 로비 벽화로,
금융 지도·금융 기관의 건축 도면·여러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참조가 겹겹이 쌓여 있다.
뉴요커의 비평가 캘빈 톰킨스는 이를 "지난 12년간 내가 본 가장 야심찬 회화"라 평했다.
Mogamma – A Painting in Four Parts (모가마, 2012)
2011년 이집트 혁명—'아랍의 봄'의 일부—에서 영감을 받은 이 4부작은,
해방과 부패, 혁명의 상징이 된 타흐리르 광장 일대의 건축적 레이어를 탐구한다.
마믈루크·이슬람·유럽·냉전 시대의 건축물이 공존하는 광장의 밀도 높은 환경을 기점으로
시작된 이 연작은, 도큐멘타 13에서 선보였다.
Cairo (카이로, 2013) 세로 약 3m, 가로 7m가 넘는 이 기념비적 작품은
사하라에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 속에서 고대 이집트 도시의 구조와 역사가
여러 벡터로 솟구치는 장면을 흑백의 선묘로 표현한다.
압도적인 물리적 존재감 속에서도 캔버스 각 지점에 쏟은 섬세한 공들임은,
오랜 시간 화면을 탐닉하게 만든다.
줄리 머레투의 작품 앞에 서는 것은 하나의 도시 전체, 혹은 하나의 역사 앞에 서는 것과 같다.
캔버스는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수십 개의 시간대가 동시에 공존하는 지층이고,
관람자는 그 표면을 헤치고 들어가 각 레이어가 품은 이야기를 더듬게 된다.
머레투의 회화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계—
문화적으로 혼종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천루와 폐허가 공존하는 세계—를
어떤 다른 예술가보다 가깝게 포착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다.
건축 도면에서 시작해 혁명의 함성과 도시의 소음이 켜켜이 쌓인 그 화면은,
지도이면서 동시에 시(詩)이고,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일기장이다.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나 정치적 망명자로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의 개인사는,
경계·이동·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작품에 깊이 각인시켰다.
머레투가 그리는 것은 특정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도시 속에서 반복되는 인류의 욕망과 충돌, 그리고 그 잔해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늘 무언가가 무너지는 동시에 솟아오르고 있다.
Haydn Symphony 103 "Drum Ro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