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1952년 폴란드 토루니에서 태어난 야첵 예르카(Jacek Yerka, 1952~)는
부모 모두 예술가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어린 시절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물감·잉크·붓이었다고
말할 만큼 예술의 언어 속에서 성장했다.
중세 고딕 건축이 온전히 살아남은 토루니의 분위기를 흡수하며,
보스와 브뤼헐의 팔레트를 공유하는 화가로 자라났다.
여러 장르의 미술작품을 시도하다가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이때부터 창조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 속의 집, 방, 자동차, 나무, 작은 동물들은 영감의 원천인 어린시절의 기억이라고 한다.
작가 할런 엘리슨이 그의 그림 33점을 바탕으로 30편의 단편을 써 <마인드 필드>를
탄생시킨 전설적인 협업으로도 유명하다.
야첵 예르카의 캔버스는 '불가능한 것들이 자연스러운 세계'다.
거대한 나무가 뿌리를 지하 도시로 뻗고, 부엌이 우주로 열리며,
새벽의 들판에서 기괴한 생명체가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을
그는 완벽한 사실주의적 필치로 그려낸다.
바로 그 역설-완벽한 기법으로 그려진 불가능한 장면-이 예르카 예술의 핵심이다.
그의 작품은 보스와 브뤼헐에서 달리와 마그리트에 이르는 초현실적이라고 평가받지만,
예르카는 그들과는 다르다.
플랑드르 기법의 발광하는 표면과 20세기 초현실주의의 꿈의 논리를,
개인의 유년기 기억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연료로 용해시켜 전혀 다른 세계를 빚어낸다.
어린 시절의 장소들, 기억된 감정들, 냄새들, 1950년대의 질감...
이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영감의 원천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묘한 그리움과 소름은,
그것이 예르카 개인의 기억이면서도 어딘가 우리 모두의 무의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가 공유하는 꿈의 고고학자다.
Grandma's Kitchen (할머니의 부엌)
예르카의 소재 중 가장 개인적인 유년의 기억에서 직접 길어온 이미지로,
플랑드르 거장들을 연상시키는 빛의 처리 속에서 일상의 부엌이 기이하고 신성한 장소로 변모한다.
Attack at Dawn (새벽의 습격, 1989)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의 기억—그 장소들, 느낌들, 냄새들,
1950년대의 질감"에서 비롯된 작품이라고 밝힌 그림으로,
낯선 생명체와 일상적 오브제가 공존하는 새벽 풍경에 어린 시절 세계의
막연한 공포와 경이가 동시에 담겨 있다.
Oligocene Gardens (올리고세 정원, 1992)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플랑드르 거장들의 전통 안에서 아크릴로 그려진 이 작품은
매우 정교한 세부 묘사를 자랑하며, 할런 엘리슨이 《마인드 필드》에서 이 그림을 바탕으로 단편을 썼다.
Cowan City (코완 시티)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거대한 성채가
숲과 뒤엉켜 하나의 유기체처럼 공존하는 환상 도시를 빈틈없는 세밀함으로 묘사한다.
Short History of the Civilization (문명의 짧은 역사, 2019)
2019년 8월 작가 공식 사이트에 '새 작품 공개'로 발표된 이 그림의 원제는 폴란드어로 Krótka historia Cywilizacji이며, 아크릴로 제작된 중형 캔버스 작품이다.
화면 안에는 인류 문명의 장구한 시간이 예르카 특유의 방식으로 압축되어 있다.
원시의 자연, 중세적 건축, 근대 산업의 흔적이 한 화면 안에 겹쳐지며,
층층이 쌓인 시대들이 마치 지질학적 단면처럼 공존한다.
웅장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따뜻하고 해학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이 그림의 미덕이다.
'짧은 역사'라는 제목은 아이러니다.
-캔버스 위에는 짧지 않은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게 새겨져 있다.
흑연 스케치에서 크레용, 파스텔을 거쳐 아크릴로 마무리되는
예르카의 단계적 작업 방식은 이 그림에서도 여실히 발휘되어,
화면의 모든 구석이 고요하게 살아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