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지상주의

일상 속으로

by 제임스

어느 날 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자기 회사에서 신사업을 이끌 팀장급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건은 단호했다.

명문대 출신에 영어와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굳이 명문대 출신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후배의 대답은 이랬다.

"아무래도 학벌이 갖춰진 사람이면 다른 것도 잘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SNS에서 화제가 된 글이 떠올랐다.

K대학교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는데,

글쓴이는 "학벌주의가 더 심해져서 SKY 출신이 더 대접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특정 직렬 공무원 시험은 명문대 졸업자만 응시할 수 있게 하고,

기업 연봉도 출신 대학 순서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노력해서 K대에 왔으니,

과거에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조금 덜 대접받아도 된다"는 말도 있었다.



이 글에 수천 개의 반박 댓글이 달렸고,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이랬다.


"인생은 야구처럼 쓰리아웃으로 망하면 안 된다.

당신은 좋은 기회로 대타로 나가 운 좋게 홈런을 쳤다.

그런데 지금 MVP라고 뿌듯해하며 훈련도 없이 1군 연봉을 달라고 떼쓰고 있지 않냐."


통쾌한 지적이었다.

입시라는 단 한 번의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이유로 평생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학벌지상주의의 민낯이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

시험을 잘 보는 능력과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가 많이 변했다.

챗GPT에 물어보면 답하는 것을 굳이 외워서 답하게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암기력이 곧 성적인 세상이 맞는가?

그래서 공부 잘한 변호사, 의사, 회계사들이 가장 먼저 사라지는 직업군이라고 하지 않는가!

현재 수능은 교과 지식을 보는 표피적 학습에 머물러 있다.



2000년대 초,

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국제팀 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허드슨코리아, 모건스탠리 등 해외 유명 투자사들이 물밀듯 국내에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그룹은 신사업과 해외 파트너가 절실했고,

학벌 신봉주의자로 유명하던 Y대 출신 상무는 팀원 충원을 지시했다.

조건은 명확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그리고 명문대 졸업장.


여섯 명이 선발됐다.

하나같이 국내 최상위권 대학 또는 해외 유명대학 MBA 출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명이 더 끼어 있었다.

지방대 출신에 초라한 외모, 눈에 띄지 않는 체격의 그룹 내 전출 직원이었다.

상무의 생각 속에서 그는 처음부터 '심부름이나 시킬 사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그 지방대 출신 직원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는 궂은일을 묵묵히 혼자 처리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귀찮을 정도로 나를 찾아와 물었고,

퇴근 후에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그에게는 체면도, 허세도 없었다.

오직 배우려는 의지와 해내려는 성실함만 있었다.



반면 학벌 좋은 여섯 명의 직원들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서로 잘난 체하기에 바빴고, 이간질과 고자질이 끊이지 않았다.

부장인 나를 향해 각자의 방식으로 줄을 서려했다.

팀워크는 애초에 만들어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들이 가진 것은 뛰어난 스펙이었지만,

정작 팀을 이끌고 함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뼛속 깊이 깨달았다.

일은 학벌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야 비로소 굴러간다는 것을!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그 성실했던 지방대 출신 직원은 지금 유명 금융사의 임원이 되어 있다.

한때 그를 내려다보던 명문대 출신 직원들은 대부분 그저 그런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비자발적으로 은퇴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한 방송사의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가 허탈함을 느꼈다.

참가자 소개 자막에 'S대 출신'이라는 문구가 붙었고, 패널들은 탄성을 질렀다.

"S 대래!" 노래 실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문구 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그 장면 하나가,

왜 부모들이 아이들 입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지를 고스란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명문대를 거쳐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지만

이런 내가 학벌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순 안에서 오히려 이 이야기를 꺼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벌이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다.

학벌은 출발선에서 일정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역량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일의 세계에서 진짜 실력은 성실함, 배움에 대한 태도,

타인과 함께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어느 대학의 졸업장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졸업장 대신 그 사람 자체를 먼저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품게 될 것이다.

그 지방대 출신 직원처럼,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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