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의 발흥, 그 뿌리를 묻다

주절주절

by 제임스

"왼쪽 니들도 잘한 것 없다."


어느 유명 가수가 내뱉은 이 한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거칠고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오늘날 극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지식인들의 긴 논문보다 더 솔직한 진실이 담겨 있다.


요즘 좌파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세계 곳곳에서

극우가 부상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특히 한국사회의 청년세대 보수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오세훈 당선자는 20대 남자로부터 72%의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20대의 보수당 지지세는 뚜렷하다.

2030이 모여드는 커뮤니티에는 몇년 전부터 꾸준히 좌파 비판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비껴간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극우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극우의 발흥을 병리로 규정하기 전에,

그 병리를 키워낸 토양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20세기 좌파 정권의 역사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처참한 간극으로 가득하다.

소련은 평등의 이름으로 수천만 명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뒀다.

마오쩌둥의 중국은 문화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지식인을 학살하고 전통을 파괴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는 급진 평등주의를 내세워 인구의 사분의 일을 학살했다.

쿠바는 혁명의 열정이 식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빈곤과 억압 속에 머물러 있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와 마두로의 사회주의 실험 끝에 중산층이 붕괴하고

수백만 명이 나라를 떠나는 난민 국가로 전락했다.

이것이 이상을 팔아 권력을 잡은 좌파 정권들이 남긴 역사의 민낯이다.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극우 성향 대통령이 선출된 데 이어 13년간 좌파 정권이 집권한 네덜란드에서도 극우 성향 자유당이 제1당에 등극했다.


21세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유럽의 진보 정당들은 세계화의 이익을 고학력 도시 중산층에 돌리는 동안,

제조업 노동자와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는 현실에는 눈을 감았다.

이민 정책을 다문화주의라는 가치로 포장하면서 치안 악화와

문화 충돌의 실제 고통은 서민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다.

그리고 그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혐오나 무지로 일축했다.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평등을 약속했던 사람들이 더 세련된 방식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감각.

바로 이 배신감이 극우의 자양분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하비에르 밀레이가 등장한 것은

수십 년간 포퓰리즘 좌파 정권이 반복한 경제 실패 끝에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시민들의 절망이 만들어낸 결과다.

브라질에서 보우소나루가 집권한 것도 노동자당의 부패 스캔들

진보 정치 전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결과였다.


물론 이것이 극우의 폭력과 반민주적 행태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의회를 습격하는 행동은 어떤 명분으로도 변호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행동의 뿌리를 외면한 채 병리만을 비판한다면,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진짜 물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극우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극우에서 자신의 언어를 찾게 되었는가?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다시 응답할 정치가 없다면,

극우를 병리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왼쪽 니들도 잘한 것 없다."

이 말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 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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