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욱
동양화는 낡았다는 편견이 있다.
수묵의 번짐, 여백의 침묵, 반복되는 산과 물의 형식.
누군가는 그것을 박물관의 언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현욱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그 편견은 조용히 무너진다.
그는 한지와 안채라는 수백 년 묵은 재료를 손에 쥔다.
하지만 그가 먼저 하는 일은 붓을 드는 것이 아니다.
날카로운 도구로 종이의 표면을 눌러 홈을 판다.
아필(芽筆)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말하자면 그림이 시작되기 전,
화면에 미리 새겨두는 침묵의 설계다.
그 위로 전통 안료 안채를 수없이 겹쳐 쌓아 올리면,
먼저 파두었던 홈은 끝내 물감이 닿지 못한 하얀 선으로 남는다.
이 선들이 그의 그림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보통의 동양화가 물감이 종이에 스며드는 번짐의 미학을 탐한다면,
차현욱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색을 겹치고 또 겹쳐 밀도를 쌓는다.
그 밀도는 서양화의 두터운 질감을 닮았으면서도,
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다.
멀리서 보면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층층이 쌓인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가 재해석한 '여백' 역시 예사롭지 않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오래도록 비움의 미학, 단절의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에게 하얀 선으로 남겨진 틈은 벽이 아니라 통로다.
노을 지는 하늘에서 낮과 밤이 서서히 스며들듯,
그 가느다란 경계 안에서 색과 색이 만나고,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서사로 이어진다.
여백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다.
그의 산수를 마주하는 경험은 구름 위를 낮게 나는 저공비행과 닮아 있다.
전체를 바라볼 때는 광활한 자연의 고요함이 느껴지지만,
시선을 낮추면 그 안에 별, 달, 산맥,
그리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이름 없는 사람의 형상이 저마다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다시점으로 구성된 화면은 관람자의 눈을 한 곳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숨겨진 요소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일은,
작가가 수집한 기억의 조각들을 함께 맞춰가는 조용한 기쁨이다.
차현욱의 그림은 묻는다.
전통은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현재를 통과하는 것인가.
그의 산수 앞에서 나는 오래 잊고 지냈던 내면의 풍경을 문득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