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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자전거 여행의 지존을 만나다.

2016 3월 이야기. 뉴멕시코에서....



이번처럼 글을 늦게 쓰는 때가 전혀 없었는데 사정이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타페 글을 올리게 되었으나 이것이 마지막 편이며 새로운 여행기록을 삼사일 간격으로 두 달간 새롭게 쓰게 되며 댈라스에 돌아가면 이번 여름에는 비행기를 타고 페루의 잉카를 다녀올 생각인데 앞일은 지나야 알 수 있으니 지금은 바램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자동차로 미대륙을 다니는 것보다 비행기로 남미를 다니는 것이 비용이 훨씬 적게 들지만 뭔 팔자인지 수년 동안 생각만 앞설 뿐 가지 못하였는데 눈높이를 낮추어 초장거리 자동차  남미대륙 여행에서 몇 곳을 대략 선정해서 비행기로 다녀올 희망에 젖어 있는 요즘이다. 


찬양이가 가을에 대학을 간다고 하였으니 학비를 미리 보내주고 홀가분하게 가방을 하나 메고 안데스 산맥 깊은 속으로 버스도 타고 걷기도 하면서 유유자적 유람을 다니면서 현지에서 여행기록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걸어서 하루 차로 하루 그렇게 골목골목을 이삭 줍기 하듯이 샅샅이 다녔으니 쓸 이야기가 많지만 이번에는 스페인 영토 시절 정착민이 거주하던 산타페 역사이야기로 방향을 설정했으므로 지나다니는 여행기록과 다른 글이 되었지만 소수의 미국인을 제외하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신대륙의 역사 사실을 바르게 알자는 뜻에서 쓰게 되었다.    




올드 산타페 중앙공원에서 바로 근처에 있는 극장으로 고전극을 볼 수 있는 곳이며 외관을 보듯이 매우 오래된 Theater "극장"이다.   




주차공간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공원을 중심으로 다니는데 어느 여인이 맨발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에 멀리서 카메라 촛점을 조절하는데 여인이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것이어서 프로정신에 어긋난 것인지 아니면 얼굴이 알려지기 싫은 것인지 그녀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어깨에 걸고 아이폰으로 조절해놓고 여인의 앞모습을 기다리는데 "깽깽이"를 연주하며 힐끗 나를 쳐다볼 뿐 틈을 주지 않기에 이것으로 끝냈다. 5월의 맨하탄 샌추럴팍에는 카네기홀 무대에 당장 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는 프로휏쇼널 뮤지션 수십 팀이 곳곳에서 연주회를 하는데 이곳 시골에서 외로이 연주하는 여인은 프로휏쇼널 관중을 외면하였다. 


연주회를 다닌 경력만 대충 나열해도 링컨센터, 줄리아드 음대, 퀸스칼리지, 카네기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솔리스트 앙상블, 엄정행 독창회, 링컨센터 소극장의 바리톤 이인영 안형일 가곡의 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던 어린아이 장 OO, 하여간 팝 싱어 등 소소한 것까지 나열하면 이 여인은 연주회 목록 1000 번째에도 끼지 못할 텐데 듣고 보는 것에는 프로 중 프로인 나그네 대하는 품성이 넉넉지 못했다.   


 


이층에는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테리아가 두어 곳 있어 운치가 있는 곳이고 이들의 자연스러움은 몸에 밴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5년 후인 1603년 개업한 상점이며 지금은 기념품 등을 판매하지만 당시에는 스페인과 멕시코 물산을 판매하던 역사의 장소다. 미동부 제임스 타운 버지니아에 최초로 유럽 이주자가 도착한 시기가 1607년이고 모두 실종되어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그들을 제외하면 역사기록의 가장 오래된 청교도가 도착한 연도가 1620년인데 그보다 대륙의 중부에 가까운 이곳 산타페에 1603년 문을 연 상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동부 13개 주로 시작된 USA 지만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883년 보다 280년이나 앞선 이 상점의 역사도 전혀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나의 의견이다. 


유럽을 떠나 신대륙으로 항해하면서 탐험하던 Hudson "허드슨" 씨가 1609년 맨하탄과 뉴저지 사이를 흐르는" 허드슨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지나 Albany 까지 범선으로 탐험하였고 그의 공적을 기리며 강의 이름을 Hudson River "허드슨 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미국 최초와 두 번째 역사로 기록되는 이주민 역사 사이에는 탐험가 허드슨 씨의 노고가 있었으나 일반인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목숨을 건 탐험가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기에 신대륙의 역사가 열리고 오늘의 미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분은 집념으로 무리한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캐나다 허드슨 베이 탐험 등으로 지친 선원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무력을 행사한 선원들에 의해 동료와 더불어 구명정에 태워져 버려진 후 바다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각 곳의 지명과 역사에 기록되어 길이 빛나게 되었으며 헨리 허드슨경은 1611년 사망으로 기록되었다. 


하여간 뉴멕시코주 산타페는 임진왜란의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작은 상점의 역사도 신대륙 최초의 역사와 탐험가 허드슨 씨의 맨하탄 탐사 역사 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산타페를 떠나기로 하고 아쉬움 속에 시내를 더 돌아보는데 군용 차량으로 된 관광가이드 차량이 있어 차를 멈추었다.   




군용 트럭 뒤에 차를 세우고 운전자에게 질문하니 1973년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되었으며 스위스군이 사용한 

차량이라고 한다. 험지 주행에 적격이어서 비포장길을 달려 산속으로 가는데 1인에 25 달러의 비용을 받는다고 한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 주차할 공간을 찾는데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속이 탔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불시에 결정하여 실행에 옮길 때도 있으나 이렇게 운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제 황막한 광야를 달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임시 거주지 댈라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기약이 없으며 어쩌면 다시는 밟지 못할 수 있는 역사의 고장 산타페를 떠나면서 눈시울이 붉어짐이 느껴진다. 올드 산타페 마을로 시작된 이곳은 독특한 스페인과 멕시코 풍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대륙의 보물이다.    




지형의 특성을 한국에 비교하면 대구와 비슷한 곳으로 높은 산이 사방에 울타리처럼 막아선 곳 황막한 사막의 평야에 산타페는 존재하고 있다.  


중남부의 모든 기찻길에는 Santa FeTrail "싼타페로 통하는 길"의 표지가 붙어 있으며 증기기관차가 여객운송의  본무대였던 시절에는 경부선과 호남선 완행열차가 갈리던 대전 인근의 "회덕역" 정도로 비교될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하면 쉽겠다.  


Santa Fe Trail 의 뜻을 정확히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한국으로 비교하면 충청도 (충주와 청주로 가는 길) 경상도 (경주와 상주로 가는 길) 황해도 (황주와 해주로 가는 길) 정도에 해당된다고 보면 근사치에 가까울 것이다.   




길을 떠나 황야에 들어섰는데 산타페 트레일 기찻길이 있어 차를 세워놓고 뒤돌아 달렸다. 


  


얼마를 더 달리는데 이번에는 말라붙은 사막의 개울이 보이기에 다시 차를 세우고 백 미터가 넘는 이곳으로 달려왔다.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어서였는데 서부영화에 보면 황야의 길은 험하므로 말라버린 개울을 신작로 삼아 달리는 무법자 무리의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이렇게 모습만 남아있는 개울이지만 언젠가 폭풍이 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면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로 변했다가 또다시 말라서 신작로처럼 보이게 된다.   




방해할 사람도 없고 차를 멈추며 가며 맘대로 감상에 젖는 시간이었다.    




서부영화에 익숙해서 그런지 나는 이런 뉴멕시코주 황야가 체질적으로 마음에 든다. 들판 곳곳에는 불이 나서 검게 그을렸으며 화재라고 해야 마른풀이 타는 정도지만 황야에서 삶을 이어가는 많은 벌레와 짐승들에게는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라 안타까움이 많다.  


봄철이 되면 텍사스주와 캔사스주 온갖 들판에는 농장주인이 인위적으로 불을 놓아 하늘에 연기가 치솟고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으로 들불이 번지는데 한국의 쥐불놀이와 같은 의미다. 즉 마른풀을 태워서 들판의 벌레를 죽이고 농사의 풍년을 바라는 의미의 연례적 행사지만 잔혹한 생각이 든다.    




연료를 채우고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주유소에 들어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 남녀가 보이기에 그들을 불렀다. 


대륙을 다니다 보면 자전거 여행자 도보여행자를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서 이곳까지 두 달 반 걸려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시카고로 올라갈 계획이라고 한다.  


 


순하게 생긴 암컷 애완견을 자전거 트레일러에 태우고 수천 마일 여행길을 다니는 여행의 신으로 불려야 할 사람들이다. 잠은 어디서 자냐고 물으니 해 질 녘 무렵에 마을 어귀 혹은 황야에서 천막을 치고 그렇게 노숙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나는 침대가 있는 차로 여행을 다녀도 차에서 생활하기 어려워 모텔을 이용하고 아무 곳이나 차를 세우고 잠들면 어느새 경찰이 와서 서치라잇과 후랫쉬를 켜고 차 안을 살피는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말하니 자신들도 그런 때가 많다고 한다. 그래도 자전거와 천막생활을 이어가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해서 개의치 않는다며 웃는다. 


사고를 방지하려고 노란색 보따리로 장만했으며 천막과 이불과 옷 등을 넣어서 매달고 다니는데 거칠어진 모습이었으나 악의가 전혀 없고 얼굴은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주유소 상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를 보고 있으며 장거리 자동차 탐사여행가와 대륙의 자전거 여행가의 만남에는 할 이야기도 많고 얘기도 길어졌다.   




남자는 190 Cm 정도 신장이고 여인은 152 Cm 쯤 되는데 선해도 이렇게 선한 모습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상점 안에서 다시 마주쳐도 인사하고 헤어져 떠나면서도 다시 인사를 하며 아쉬워하는 이들의 앞길을 축복하였다. 나는 여자 복이 없어서 이렇게 용감하고 도전적이고 낭만적이며 진취적인 여인을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 여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인으로 생각 들기도 한다. 2009년 여름 몬타나주 북부에서 만난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 두 할머니와 같은 그런 낭만적인 여인을 내 일생에 만날 수 없다. 


나와 더불어 대륙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여인은 없을 테고 집구석에서 불륜을 소재로 한 삼류 연속극에 미쳐서 눈알을 까뒤집고 TV만 바라보고 사는 것들이 바글거리는 한인사회다. 비디오 테이프가 판치던 시절 양손의 비닐봉지에 비디오 테이프 수십 개를 빌려가는 훌러싱에 거주하는 남녀 이웃을 부지기수 보았고 내 집구석에도 재래식 화장실에 앉은 똑같은 모습으로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TV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남편과 어린아이들에게 무관심했던 미친年이 있었다.  


아이들 보는 활극 만화보다도 형편없는 TV 연속극에 중독되면 여자는 바로 미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하지 않으며 배운年이나 못 배운年이나 연속극 앞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도 찾을 수 없다. 

신앙심도 없이 교회에 미쳐서 친목과 수다를 목적으로 오가는 일과 연속극을 보고 "있을 때 잘해"라는 헛소리를 늘어놓던 황당한 것과 그 주변의 미친 것들을 벌레처럼 바라보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어느 정도 연속극에 미쳤으면 전화로 수다를 떨면서도 연속극 이야기고 밥을 올려놓고도 연속극이며 찌개를 끓이면서도 연속극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던 황당한 시간들..... 


연속극과 전혀 무관한 가족에게도 연속극 내용의 언어와 행동을 하는 광기 때문에 용광로가 있었으면 산채로 그곳에 집어넣고 싶을 정도로 혐오하던 연속극에 미친 것에 비하면 이 여인은 천사의 성격과 표정을 갖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괜찮다는 서울교대 졸업에 서울서 교사를 한 것이 연속극에 미치니 알파벳도 제대로 구별을 못하는 주변의 무식한 것들과 시시덕거리며 연속극 이야기로 시작하고 연속극 이야기로 끝마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인생 정말이지 운도 더럽게 없고 재수도 더럽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불륜 연속극을 보기 위해서 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던 귀신의 모습은 떠올리기도 싫지만 참으로 비교되는 삶이어서 아쉽다는 것이다. 하여간 무법천지라면 불륜 연속극 시나리오 작가란 것들은 모조리 잡아서 용광로에........   




이들과 헤어져 서로의 길을 떠나는데 부부는 길 건너에 새로 주유소를 만드는 빈터로 들어가기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빈터 한구석에서 잠자리를 만들려는 모습이었으며 다시 저들 부부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네바다 사막을 건너고 록키산맥을 넘고 넘어서 이곳까지 온 대륙의 자전거 여행자가 존경스러웠다. 5년 전 그린마운틴 버몬트주에서 만났던 가난한 도보여행자 조셉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20여 년 동안 걸어서 대륙을 여행하며 사는 조셉은 대략 4만 Km는 더 걸어 다녔다며 고단한 그의 삶을 이야기하던 추억이 있다.    





재작년 7월에 한국서 온 학생들을 데리고 8'200 마일 대륙 여행을 다니며 40번 고속도로를 지나며 텍사스 경계인 이곳에 멈추었으며 벌써 2년의 세월이 지나려는 그때의 추억에 차를 멈추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이곳 도로변에 젖소만 가두어 둔 집합소가 있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던 때문에 갑자기 서지 못하여 어중간한 지점에 차를 세웠다. 들판에 큰 연못이 있는 곳이며 가로세로 길이를 눈짐작으로 해보니 700 m X 150 m 쯤 되는데 촘촘히 서있는 소떼의 일부를 세면서 전체를 추정하니 대략 삼사 만 마리 정도로 보였다.   




먼 앞길을 살피면서 이곳으로 들어갈 길을 찾는데 진입할 길이 보이지 않기에 비상등을 켠 채 길 가장자리에서 이들을 바라보며 운명을 짐작하였다. 


젖을 짜는 젖소는 청결하게 키우는데 이곳에 모여있는 수만 마리 홀스타인종은 수컷으로 태어나 식용으로 길러진 것과 또한 젖을 짜고 새끼를 낳는 암컷으로 태어나 이제 늙어서 우유생산도 줄고 새끼를 낳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 고깃소로 팔려가는 두 종류의 홀스타인종 젖소로 판단이 되었다.    




또 다른 옆에는 적은 숫자의 소떼가 있는데 팔자가 같은 소떼로 보였고 인적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소가 모여들어 판매하는 곳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우시장)을 stockmarket "스탁마켓"으로 부르는데 이곳에는 트레일러에 싣기 위해서 우리에 몰아넣고 한 마리씩 차에 실을 수 있는 출구가 있다. 이곳에 모인 소들은 내가 떠나고 난 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도살장으로 실려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 슬픈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녀석도 있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위해 마른풀을 제공하는 사람을 하늘에서 온 천사로 알고 있는 소도 있을 것이다.  



고깃소는  먹이 대비 성장의 꼭지점에 도달하면 들판에서 2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살다가 카우보이들이 소몰이하여 각 농장마다 있는 소 집합소에 몰아넣어 트레일러에 실어 보내면 도살장 입구에서 이삼일 대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독가스로 유태인을 몰살시키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다름없는 도살장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쇠공으로 머리에 충격을 받고 뇌진탕으로 죽으면 따듯한 체온이 식기도 전에 사지가 잘리고 내장이 꺼내지며 한편에서는 도축사들이 핏물이 마구 떨어지는 부위를 나누는데 한편에서는 몇 분이 채 안되어 가공되어 컨베어 벨트로 마구 밀려들어가는 소시지의 환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지금이야 이성이 있어서 소떼를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처음 소의 골을 먹던 그 시절 병약했던 여섯 살 때는 엄마가 주는 것이니 잘도 받아먹었고 나중에는 숙달되어 잘린 소머리에서 서양식 스푼을 넣어 소골을 직접 꺼내어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아이스크림을 떠먹듯 날것으로 먹었으며 삶은 돼지 앞다리는 이틀에 한 번은 먹었으며 쓸개즙과 지라 등 어려서부터 가리지 않고 먹어야 했던 슬픈 사연들.... 


이웃집 한약방 할아버지는 얄밉게도 자주 뜨거운 한약을 사발에 담아 가져오셨고 눈깔사탕을 손에 들고 재촉하는 이웃집 아저씨들에 잡혀 울면서 마시던 그런 추억의 회상.... 

칼로 벤 자라의 목에서 쏟아진 찬피를 강제로 마시던 황당했던 서너 살 때의 슬픈 추억이 있었다. 

서너 살 아이 때부터 나는 타의에 의해 몬도가네의 삶을 살았는데 지금도 술을 제외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가리지 않으면 내 평생 음식이 맛있네 없네 군소리해본 적이 없다. 


내가 살기 위해 동물의 부위를 먹기는 하지만 지구에 생존하는 생물의 먹이사슬은 모든 생물의 번식을 위해서 서로 잡아먹고살도록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신의 창작품이어서 그렇다.  

지금도 불현듯 1968년에 본 추억의 다큐멘터리 영화 "몬도가네"가 떠오른다. 세상의 온갖 아수라장과 아귀다툼과 같은 처참한 상황을 취재하여 영화로 만든 것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반인륜적 내용의 영화다. 벌레를 입안에 가득히 넣고 씹어먹는 내용도 있고 유소년 아이들을 납치해 감금하여 사지불구로 만들어 동냥질을 하게 하는 무식한 인도 상놈들의 모습.... 


하여간 인류는 가장 많은 생물을 희생시키는 존재인데 수천수만 마리 불개미로 술을 담가서 마시는 자도 있고 뱀을 산채로 병에 넣고 소주를 부어 땅속에 묻는 한국인은 흔했다.     



소떼의 죽음을 슬퍼하며 길을 떠났다. 


나는 힘도 없고 혼자 살기에도 벅찬 나약한 인간으로 너희들 죽음까지 간섭하는 것은 사치이며 교만일 수 있으나 그래도 나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으므로 너희들 죽음을 슬퍼할 줄 안다. 

멕시코 여행에서는 생후 2주 만에 식용으로 팔려가는 새끼 염소 "까브리 또"를 안고 슬퍼하였으나 작은 생명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 들판에 떼 지어 다니는 소떼를 보면 언제나 안스러운 생각이 끊이지 않지만 너무 감상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으니 그것도 문제다. 


중부 평야의 풍경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지평선이 전부이므로 사진으로 보여줄 것도 없고 특별히 이야기를 쓸 것도 없으며 도화지에 가로 일직선 하나 그은 모습과 다르지 않으므로 지평선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기로 하고 이번 주말 혹은 다음 주부터는 중북부와 웨스트 버지니아로 이어지는 여행 이야기를 간간히 올리려고 한다. 


자세한 사연은 담달쯤 이야기 사이에 끼워 넣겠지만 이번에는 일정이 끝나고 댈라스로 귀환해야 몇 마일을 다녔는지 알 수 있으며 중부에서 북부로 남부 훌로리다를 돌아서 댈라스로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도 5월 말에는 돌아갈 수 있으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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