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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알라모사


여행을 오래 하려면 무리한 운전을 금하고 자면서 쉬면서 먹으면서 매우 천천히 다녀야 하고 해가 넘어가기 훨씬 전에 모텔에 들어가야 한다.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새벽부터 밤까지 운전하고 먼 거리 다닌 것을 자랑하지만 일찍 출발해서 이삼백 마일 미만을 운전하고 나머지 시간은 도착한 현지를 살피고 역사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서양인의 여행타입을 살펴보면 이들은 급속한 여행이 아니라 한 곳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타입이고 하룻밤 묵은 후 떠나지 않고 그 주변에서 즐길 것은 모두 즐기고 다니는데 자동차 여행을 하더라도 현지에서 래프팅과 말타기도 하고 산악장비도 갖추고 숲 속을 다니며 자연과 어울리는 여행자가 많다. 

곳곳에서 만나는 이들과 대화하면 나의 여행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알지만 한 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떠나는 것이 나의 장거리 여행이다. 몸이 지치고 글 쓰는 시간이 많이 걸릴 때는 이삼일 머물기도 한다.   


 

저편의 Great Sand Dune을 떠나서 먼 거리에 와서 뒤돌아 보니 또 다른 폭풍이 몰려와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저곳에서 눈앞에 펼쳐진 황야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파이크 기병대가 알라모사로 달린 것이다.    



남쪽으로는 사료를 키우는 목초지가 펼쳐진 곳이지만 땅이 광대해서 부분적으로 풀을 생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저물기도 전에 들판의 소는 자신들의 우리로 줄지어 걸어가고 일행을 뒤따르는 소는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가기도 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먼저 온 소는 이미 우리에 들어왔는데 숫자가 매우 많지 않으면 밤에 사냥하러 다니는 늑대와 이리의 공격에 희생당하기 때문에 보호본능에 의해 제절로 찾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며 안도하겠으나 천사로 가장한 인간이 너희에게 풀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는 그때는 이미 목숨을 구하기에 늦었음을 알고 통곡할 때가 곧 오게 된다. 

늑대와 이리는 배를 채워 생존하기 위해 한 마리씩 잡아서 먹지만 인간은 너희들 가죽까지 알뜰히 거두어 팔아치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거진 숲에 목초지를 만들어 소를 키우는 알프스 풍경을 보고 평화롭다고 주절대는 시인이 있으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지저귀는 것이며 너희들 동족의 죽음과 비명을 생각할 정도로 어질고 서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베어서 말린 야들야들한 풀을 저장해 놓았다가 주는 인간을 하늘에서 온 천사로 알겠지만 그들의 잔악함을 깨달을 때가 곧 온다. 들판의 소떼를 보면 언제나 한결같은 생각을 하지만 저들의 운명을 내가 막아줄 능력이 없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 그러니까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한 그 시절에 아버지께서 타이탄 트럭에 실어 보내는 여러 마리 누렁이 소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으며 이후 축사에 발길을 끊었고 곧이어 미국으로 건너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누렁이 소가 소리 내어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무수한 소떼가 있는 미국 중부 남부 북부를 다니며 만나는 소들의 운명을 늘 떠올리게 되는데 깡총거리며 뛰어다니는 송아지는 길어야 2년이며 큰 소는 언제라도 도살장으로 떠나게 되어 있다.

젖소는 새끼를 낳으며 우유를 생산하는 생후 8~9살 까지 장수하지만 이후 젖이 마르는 그날이 되면 갈 수 있는 양로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날 이후는........   



알라모사에 저물녘에 도착을 했는데 초입에는 체격이 작은 증기기관차가 보물의 신분이 되어 보존되어 있어서 혹시 문이 열렸을까 걸어갔는데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었다.   



1883년에 제작되어 콜로라도 철도 사업국에서 D&RG "덴버와 리오그란데"를 오가며 55년 동안 사용되고 은퇴하여 수리를 마치고 1939년에 뉴욕시 훌러싱 메도우 팍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갔다가 이곳에 보관되었다.    


세계 각국에 진출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후난 성 중국인들이 이곳 황야에 진출하여 식당을 하고 있기에 오랜만에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 들어갔다. 주인은 영어가 중국 발음인 남자였으나 종업원은 모두 백인 여성들이었고 무척 친절하였으며 식당 분위기를 보니 알라모사는 상당히 소득이 많은 마을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였는데 채소볶음에 과자를 얹어서 내왔기에 모조리 걷어내었다. 그리고 매운 고추기름을 달라하여 오랜만에 매운맛으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이런 것을 미국서는 중국음식이라고 하지만 원래 중국에 없는 음식이고 서양인 입맛에 맞도록 삶고 볶아서 맵지 않게 서빙하는 변종 음식이다.)    



해는 저물었으나 시내를 한 바퀴 살피며 내일을 위해 지리를 익혀두는 시간이다.   



필리핀계 연로하신 아주머니가 귀한 동양인 여행객을 만나게 되어 반기기에 그녀와 더불어 이야기가 길었다. 이곳 마을에 약 1만여 명 인구가 있는데 동양인은 중국식당과 자신의 부부뿐이라고 한다. 

동족이 없어서 살기 외롭겠다 했는데 지금은 익숙해서 괜찮다는 아주머니였으며 자녀는 뉴욕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만나기 어렵다며 웃는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깨끗한 모텔이어서 마음에 들었고 실내수영장이 있는데 글 쓰는 일 때문에 생략하고 지난번 콜로라도 스프링에서 산 마카로니 뻥튀기 과자를 침대에 던져놓았다. 여행기록을 쓸 때는 입에 과자 또는 초콜릿이 쉬지 않고 들어가야 하며 코카콜라를 마셔야 정신이 맑아지고 글이 잘 써진다.   



전날 봐 두었던 철도역에 갈 계획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눈과 상극인데 이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나 날씨는 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 방법이 없다.    



옆집 식당에서 나의 여행길 아침식단인 베이컨, 덜 익힌 달걀 두 개, 토스트, 홈후라이 감자를 주문하고 날이 추우니 쓴 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이 집은 인심이 후해서 두꺼운 베이컨을 사용해서 좋았다.    



맘에 드는 모텔이어서 셔터를 누르러 길에 나갔는데 필리핀 아저씨가 눈을 치우며 나타났으며 모텔 이름이 독특했는데 Lamplighter "호롱불" 또는 "성냥불" 이었다.     


                 퍼붓는 눈 속에 역전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사용하지 않고 전시품으로 보존될 옛날 기관차와 객차가 많아서 별도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려 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철길이 매우 좁은 특이성이 있는 곳인데 아쉽게 되었다.  


 

            아직도 철길을 사용하고 한편에서는 디젤기관차 소음이 들려왔다.   



               워낙 넓은 지역이어서 운전하여 곳곳을 살피려 했는데 오늘은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오십 년대에 사용했을 듯한 기관차의 모습이 신기했는데 길을 떠나게 되어 서운했다.   



눈이 오지 않았으며 160 서부로 가서 인디언 유적지를 가고 싶었는데 눈이 많이 퍼부어 28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기로 즉석에서 결정하였다.  

(참고) 

미국의 모든 길은 숫자로 표시되어 있으며 방향을 잃었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전국의 고속도로와 시골의 작은 길을 포함한 길에 같은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니 반드시 익혀두어야 한다. 

예. 285 <-- 끝의 홀수 숫자는 앞부분 상관없이 남북을 다니는 길이다.

예. 160 <-- 짝수는 숫자에 상관없이 동서로 연결되는 길이다.


앞으로 진행할 길은 이미 알고 있으니 길을 잃으면 곳곳에 있는 도로 숫자로 판단하여 가면 된다.  

주변 인물 중에 도로 숫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그들은 생활권 인근에서 늘 다니는 길을 오가는 것이므로 알 필요도 없겠으나 방향을 찾을 때 유용하다. 위 표지판은 160번과 함께 서쪽으로 같이 표기되어 있으나 옆으로 조금만 가면 남쪽으로 이어지는 285번 도로가 있다는 표시다.     




눈이 무척 많이 내리는데 지금의 일기에 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 유적지로 가려면 기나긴 산맥을 눈길을 헤치며 넘어가야 하므로 위험하여 포기하고 남쪽으로 떠났다.   


장거리 여행에서 절대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감한 척 잘난 척 만용(객기)을 부리면 안 된다. 상황이 악하면 피해서 가고 상태가 좋으면 지속하면 될 터인데 내 주변의 많은 사내들 하는 말이

"나처럼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없어, 난 체력이 좋아서, 난 잠을 안 자고 스무 시간을 달렸어, 난 고속도로에서는 보통 시속 90 마일 (145 Km)로 달려"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지만 무식한 마인드가 변하지 않으면 머잖아 저승을 지름길로 갈 수 있으므로 겸손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부인은 네가 쓰던 칫솔과 신발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낯익은 사람의 품으로 달려가게 되어 있으며 너의 부인은 그를 여보라 부르고 자녀는 그를 아빠로 부르게 되며 수전노가 되어 아끼고 아끼며 모아놓은 재물은 샛서방이 사용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오래전 휠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나신 나를 애지중지하시던 선배님이 계셨는데 60년대 한국 제일의 골게터로서 명성이 자자한 분이고 한국 원정경기를 두 번이나 같이 간 분이셨는데 그렇게 강직한 선배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땅이 굳기도 전에 부인은 남편의 절친한 친구와 살림을 차려 지금껏 살고 있다. 이런 것이 세상의 현실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절대 만용을 부리지 말고 열 받지 않으려면 오래도록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말을 많이 기르는 농장이 있는 곳이라 폐가로 변한 건물에 야생마를 그려 놓았다.    


              주변 황야가 곡식을 키울 환경은 아니지만 중도에 곡식저장고가 있다.   




옛날 미국의 시골 모습을 보여주는 공작소가 보인다. 


지금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된 건물이지만 한때는 이 지역의 농기계와 가전제품 등 모든 기계의 수리를 해주던 집이지만 시대가 변하여 고쳐 쓰지 않고 고장 나면 새로 사서 쓰는 시대가 되면서 문을 닫은 집으로 보면 되겠다.  

(개인이 애지중지하던 것은 지금도 고쳐 쓰는 사람들이지만 70년대부터는 TV 세탁기 냉장고 전자렌지 등 가전제품은 소비품이므로 고장 나면 버리고 새로 사는 미국이라서 이런 수리점도 없고 수리하는 비용이 새로 사는 것보다 적게 들지도 않으므로 버리면 되고 미국은 기계와 가전제품 천국으로 한국의 삼분의 일 정도 가격에 소득이 많으니 미련 없이 버리면 된다.)   




한편에서 비포장 도로에 들어가서 보니 곡식창고에 연결된 철로가 끊어졌으며 이곳은 기차도 다니지 않는 곳으로 곡식 농사도 멈춘 곳으로 보였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며 경작지를 살펴보는데 밭을 가는 모습이 특이한 곳이었고 밭이랑을 남겨두는 농사방법이었다.    



                 들판에 외로이 있는 농경 주택은 분위기로 보아 멕시코계 주민이 사는 듯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같은 종끼리는 미우나 고우나 늘 이렇게 붙어서 살아가는데 어쩌다 들판에 혼자 있는 소를 볼 때도 있으나 지켜보면 반드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합류하여 지낸다.    



일, 이차대전 참전 기념비이며 검게 변색된 동판에 혹시라도 한국인 표기가 있을까 하여 살펴보던 시간이었다. 미국에 가면 한인을 조심하라고 한다는데 그런 이유로 의심하는 한국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동족이라서 만나면 반갑고 안 보이면 궁금해지는 것은 조상님의 혈통이 같기 때문이다.     



               통나무집을 만드는 작은 회사.   




안토니토 마을에 도착을 했다. 완전히 평지로 변했으나 이곳의 고도는 해발 2'400 미터나 되는 마을이다. 애리조나주 뉴멕시코주 유타주 콜로라도주 와이오밍주 몬타나주 아이다호주 전체가 대체로 평지는 해발 2'000 미터 정도 되는 고원 지대지만 광대한 지역이어서 구별이 안될 뿐이다.   



                백리쯤 내려오니 눈은 그쳤지만 인적이 전혀 없었다.  




분명히 사람이 사는 마을임에도 지나온 모든 지역이 유령마을처럼 인적을 볼 수 없는 독특한 지역으로 이들의 일상은 늘 이런 것 같았다.    




마을에 식수 탑 혹은 곡식저장고가 있는데 그림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들소 떼가 달리는 황야이며 백인 이주자들이 농사를 짓고 험산준령인 Cumbres Pass 에는 철길이 열리고 터널을 만들어 기차가 다니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이다. 


문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이 맑은 사람들이었으나 골드러시에 금은보화를 캐러 서부로 밀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이었고 그들은 물질문명이 발달한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온 때문에 정서가 그리 맑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림으로는 서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평화의 모습이 보이지만 백인은 예나 지금이나 양반의 위치에서 군림하며 원주민은 그들의 바닥을 헤매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Native American "미대륙의 원주민"에 대한 차별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이 존재하는 먼 미래에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흰 건물은 1900 년도에 설립된 콜로라도주와 뉴멕시코주 지방의 남미계 토착 원주민의 문화공간 

           (문화센터) 중 하나다.   



             오래된 나이트클럽도 있다.   



크지 않은 마을에서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다니는데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으며 잡다한 농산물을 팔러 나온 주민은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국립 열차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열차 공작소를 샅샅이 살피며 다닌 날이었으며 귀한 증기기관차 등 옛날 객차의 이야기는 아껴두었다가 이번 여행기를 모두 마친 후 한편을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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