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프랑스 평준화의 불평등한 결과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려던 교육의 역설

by 박상훈

15화. 프랑스 평준화의 불평등한 결과

―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려던 교육의 역설



1985년,

프랑스 정부는 야심찬 목표를 발표했다.


"2000년까지 동년배 80%가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게 하겠다"


당시 합격률은 30%에 불과했으니

혁명적 변화였다.


목표는 달성되었다.

2020년 바칼로레아 합격률은 95%에 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교육의 질이 급격히 하락한 것이다.


시험 문제의 하향 평준화


바칼로레아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시험 문제가 계속 쉬워졌다.


1990년대 바칼로레아 수학 문제와

2020년 문제를 비교하면

난이도 차이가 극명하다.


한 프랑스 수학 교사의 증언이다.

"30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문제가

지금 바칼로레아 문제보다 어려워요.

하지만 합격률 목표 때문에

계속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었죠."


대학 교육의 붕괴


바칼로레아 취득자는

자동으로 국립대학 입학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대학 교육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파리 8대학의 경우 1년차 중퇴율이 70%를 넘는다.

기초 수학조차 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공대에 입학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대학들은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수준의 보충 수업을 개설했다.

고등교육이 아니라

중등교육을 다시 하였던 셈이다.


사교육 시장의 폭발적 성장


공교육이 하향 평준화되자

상류층들은 사교육으로 눈을 돌렸다.


프랑스 사교육 시장은

2000년 10억 유로에서

2020년 40억 유로로 4배 성장했다.


특히 그랑제콜 준비반(프레파) 사교육이 핵심이다.

연간 수업료가 2만 유로를 넘는 학원들이 생겨났고,

부유층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특별 관리를 받았다.


결국 공교육 평준화는

더 큰 불평등을 만들어낸 셈이다.


교사들의 사기 저하


교육 수준 하락은 교사들의 사기도 떨어뜨렸다.

프랑스 교사 연봉은 OECD 평균보다 낮고,

사회적 지위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수학 교사 부족이 특히 심각하다.

2023년 기준 전국 수학 교사 정원의 20%가 충원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과목 교사들이 임시로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 고등학교 교장의 말이다.

"실력 있는 교사들은 모두 사립학교나 그랑제콜로 갑니다.

공립학교에는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은 교사들만 남아요."


독일과 핀란드의 차별화 전략


독일은 정반대 길을 걸었다.

김나지움(인문계), 레알슐레(실업계), 하웁트슐레(직업계)로

학교를 나누어 각각 다른 교육을 제공한다.


모든 학생을 대학에 보내려 하지 않고

적성과 능력에 따라 진로를 분화시킨다.

그 결과 직업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사회 전체의 인력 수급이 균형을 이룬다.


핀란드도 마찬가지다.


학업 성취도는 높지만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고.

개별 학생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했다.


PISA 점수의 지속적 하락


프랑스의 교육 수준 하락은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도 확인된다.

2000년 수학 511점에서 2022년 474점으로 떨어졌다.

이는 OECD 평균(472점)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상위권 학생 비율의 감소다.


수학 상위 10% 학생 비율이

2003년 15%에서 2022년 7%로 반토막났다.

엘리트 인재 양성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랑제콜의 고립 심화


공교육이 무너지자

그랑제콜의 특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일반 대학과 그랑제콜의 격차가

과거보다 훨씬 벌어진 것이다.


에콜 폴리테크닉 학생의 90%가

연간 5만 유로 이상 사교육을 받은 가정 출신이다.

교육 기회의 평등을 위한 개혁이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시킨 아이러니.


싱가포르와 한국의 성공 모델


싱가포르는 엄격한 선별 교육으로

높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학생들을 능력별로 나누어

각각에게 최적화된 교육을 제공한다.


한국도 비슷하다.


경쟁이 치열하지만

전체적인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수학, 과학 분야에서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교육 포퓰리즘의 한계


프랑스 교육 정책의 실패는

교육 포퓰리즘의 전형적 사례다.


"모든 학생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구호 뒤에 현실을 외면한 것이다.


학생들의 능력과 적성이 다르다는

기본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인위적 평등을 강요한 결과,

전체 교육 시스템이 붕괴했다.


오늘의 교훈


평등과 평준화는 다르다.


진정한 교육 평등은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을 강요하면

오히려 기회의 평등을 해친다.


다음 화 예고


16화에서는 프랑스 환경 정책의 이중성을 다룹니다.

원전 대신 재생에너지를 추진하면서도

실제로는 독일에서 석탄 전력을 수입하는

모순된 에너지 정책을 분석합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프랑스가 선택한 잘못된 길

2부 5화. 평준화의 불평등한 결과 – 모든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려던 교육의 역설

(이 글은 프랑스 교육부 통계, OECD PISA 보고서, 프랑스 사교육 시장 분석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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