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같은 출발선, 지금은 다른 결과
21화. 프랑스는 왜 독일처럼 못하나
― 20년 전 같은 출발선, 지금은 다른 결과
노동법 개정안이 발표될 때마다
프랑스 거리는 불타오른다.
2016년 엘 콤리법,
2017년 마크롱 개혁,
2023년 연금 개혁.
번번이 대규모 시위에 부딪혀 후퇴하거나 무력화됐다.
왜 프랑스는 항상 이럴까?
그런데 20년 전, 독일도 프랑스와 똑같았다.
2003년 독일은 '유럽의 병자'였다.
실업률 11%, 경제성장률 -0.7%.
프랑스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정치적 자살을 각오하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아픈 곳을 도려내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
그의 결단이 20년 후 독일을 바꿨다.
하르츠 4 개혁의 혁명적 변화
하르츠 개혁의 핵심은 간단했다.
복지와 일자리를 연결한 것이다.
무조건적 실업급여 대신
일할 능력이 있으면
반드시 일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기존에는 실업급여를 32개월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르츠 4 개혁 후에는 12개월로 단축됐다.
그 후에는 '실업급여 2'라는 최소 생활비만 지급하되
대신 일자리 알선과 직업 훈련을 의무화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엄격한 원칙을 관철한 것이다.
미니잡의 혁신적 도입
독일은 '미니잡(Minijob)'이라는
새로운 고용 형태를 만들었다.
월 450유로(현재는 520유로) 이하 소득에 대해서는
사회보험료와 소득세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이로 인해 단시간 근로, 부분 취업이 활성화됐다.
특히 여성, 학생, 은퇴자들이 쉽게 일할 수 있게 됐다.
"조금이라도 일하는 것이
전혀 일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철학이었다.
현재 독일에는 700만 개의 미니잡이 있다.
실업률을 낮추고 노동 참여율을 높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한부 고용의 유연화
독일은 유기 계약(시한부 고용)도 대폭 늘렸다.
2년까지는 사유 없이 시한부 고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기업들이 부담 없이 직원을 채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와 달리 해고 절차도 간소화했다.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비교적 쉽게 해고할 수 있다.
대신 실업급여와 재취업 프로그램을 강화해
해고된 사람들이
빨리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했다.
직업 교육 시스템의 강화
하르츠 개혁의 숨은 핵심은 직업 교육이었다.
실업자들에게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취업 가능한 기술을 가르쳤다.
특히 '이중 교육 시스템(Dual System)'을 확대했다.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기업에서 실습을 하는
견습생 제도를 현대화한 것이다.
그 결과 독일 청년 실업률은 7%대로,
프랑스(20%)의 3분의 1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적 저항과 정치적 대가
하르츠 개혁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
노조는 총파업으로 맞섰고
사회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노동자를 배신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슈뢰더 총리는 2005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그는 "독일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며
정치적 희생을 감수했다.
진정한 리더십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메르켈 시대의 수확
하르츠 개혁의 진가는
앙겔라 메르켈 시대에 나타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독일만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유연한 노동시장 덕분에 기업들이
경기 변동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독일 실업률은 3%대까지 떨어졌다.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달성한 것이다.
수출 경쟁력도 크게 향상됐다.
독일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되찾았다.
'독일제'가 다시 세계 최고 품질의 대명사가 됐다.
20년 후, 프랑스와 독일의 극명한 대조
2003년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 독일: 실업률 3.1%, GDP 성장률 1.8%
- 프랑스: 실업률 7.3%, GDP 성장률 0.8%
독일 1인당 GDP는 프랑스를 추월했고
무역 흑자도 독일이 압도적으로 높다.
구조개혁 유무가 20년 후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다.
프랑스는 왜 독일처럼 못했을까?
개혁을 시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거리의 저항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네덜란드도 비슷한 개혁을 했다.
1980년대 '네덜란드병'에 시달렸던 네덜란드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했다.
정부, 기업, 노조가 함께
임금 인상 자제와 근로시간 단축에 합의했다.
대신 고용 안정성과 사회보장을 강화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파트타임 경제'로 불리며
높은 고용률과 삶의 질을 동시에 달성했다.
현재 네덜란드 실업률은 3%대로 유럽 최저 수준이다.
덴마크의 유연안전성 모델
덴마크는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모델을 만들었다.
기업에게는 쉬운 해고를,
근로자에게는 관대한 실업급여를,
정부에게는 적극적 재취업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삼각 모델이다.
해고는 쉽지만 실업급여는 월 2,000유로까지 받을 수 있다.
대신 3개월 내에 반드시 재취업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거부하면 급여가 중단된다.
이 모델로 덴마크는 높은 고용률과
낮은 실업률을 동시에 달성했다.
프랑스가 배워야 할 것들
프랑스도 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독일과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사회적 합의를 먼저 만들었다.
프랑스는 위에서 밀어붙였다.
독일은 복지와 일자리를 연계했다.
프랑스는 기존 권익 보호에 집착했다.
독일은 정치적 희생을 감수했다.
프랑스는 선거를 의식해 후퇴했다.
이것이 20년 후 결과를 갈라놓은
결정적 차이였다.
개혁의 정치경제학
하르츠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한 목표와 강한 추진력이었다.
슈뢰더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보다
독일의 장기적 이익을 우선했다.
또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중요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 의식이
개혁 동력이 됐다.
프랑스도 이런 리더십과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독일처럼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훈
때로는 아픈 수술이 환자를 살린다.
2003년 독일과 프랑스는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독일은 수술을 감행했고, 프랑스는 진통제만 먹었다.
20년 후 독일은 완치됐고, 프랑스는 여전히 앓고 있다.
진정한 리더십은 인기 영합이 아니라
장기적 이익을 위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슈뢰더는 선거에서 졌지만 독일을 살렸다.
프랑스 대통령들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프랑스는 제자리걸음이다.
구조개혁은 고통스럽지만 미래를 위한 필수적 투자다.
프랑스는 언제까지 개혁을 미룰 것인가.
거리의 함성이 국가의 미래보다 중요한가.
다음 화 예고
독일이 아픈 수술을 했다면,
덴마크는 예방의학을 선택했다.
"해고를 쉽게, 재취업을 더 쉽게."
플렉시큐리티라는 묘한 균형이 어떻게 덴마크를 유럽 최고 고용률 국가로 만들었나.
프랑스가 덴마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해법과 재건
3부 1화. 프랑스는 왜 독일처럼 못하나 – 20년 전 같은 출발선, 지금은 다른 결과
(이 글은 독일 연방노동청 통계, OECD 고용 보고서, 하르츠 위원회 원문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