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개혁이 좌절된 구조적 이유
12화. 왜 거리의 저항은 개혁을 막았나
― 노동법 개혁이 좌절된 구조적 이유
2016년, 당시 경제부 장관이었던 에마뉘엘 마크롱은
프랑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깨뜨릴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엘 코므리 법'(노동부 장관 미리암 엘 코므리의 이름을 딴)이라 불린
이 개혁안의 핵심은 간단했다.
기업들이 더 쉽게 직원을 채용하고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하르츠 개혁을 모델로 한
프랑스판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밤 새워 일하는 청년들의 반발
하지만 개혁안 발표와 동시에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가 터져나왔다.
특히 젊은 세대의 반발이 거셌다.
'밤 새워 일하자(Nuit Debout)'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리 공화국 광장을 점거한 청년들은
"우리를 착취하려 한다"며 강하게 저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개혁의 최대 수혜자가 될
청년층이 가장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CGT 노조의 총력 저항
프랑스 최대 노조인 CGT(노동총연맹)는
전면전에 나섰다.
필리프 마르티네스 CGT 위원장은
"이는 노동자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선언했다.
전국적으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SNCF(국철) 파업으로 교통망이 마비되고,
공항과 항만에서도 연쇄 파업이 발생했다.
특히 정유소 봉쇄는 치명적이었다.
전국 주유소의 30%가 기름 부족에 시달렸고,
정부는 비상 석유 비축분을 사용해야 했다.
기업들조차 중립적 태도
놀랍게도 기업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개혁의 직접적 수혜자가 될 기업들조차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프랑스 경영자총연합(MEDEF)의 한 관계자는
익명으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우리도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노조와 사이가 더 나빠질 바에야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는 프랑스 기업들이 얼마나
'평온한 현상 유지'에 안주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적 계산에 발목 잡힌 올랑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딜레마에 빠졌다.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노조와 정면충돌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올랑드는 개혁안의 핵심 내용들을
대폭 삭제하고 말았다.
해고 절차 간소화는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근로시간 유연화도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다.
언론들은 이를 "물 탄 와인"이라고 조롱했다.
49조 3항의 강행과 정치적 대가
그래도 정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헌법 49조 3항(정부가 의회 동의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조항)을
발동해 개혁안을 강행 처리했다.
하지만 정치적 대가는 혹독했다.
올랑드의 지지율은 10%대까지 추락했고,
결국 재선 도전을 포기해야 했다.
사회당은 2017년 대선에서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
영국과 독일의 대조적 성공
같은 시기 영국과 독일은 어땠을까?
영국은 대처 정부 때부터 지속해온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결실을 보고 있었다.
브렉시트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을 유지했다.
독일은 슈뢰더 정부의 하르츠 개혁 덕분에
'유럽의 엔진'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청년 실업률은 7%대로 프랑스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청년 세대의 역설적 선택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개혁을 반대했던 프랑스 청년들이
결국 해외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6년 이후 런던으로 간 프랑스 청년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유연한 노동시장'을
외국에서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클레어 뒤발(26, 가명)의 증언이다.
"당시에는 정부가 우리를 착취하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런던에서 일해보니
유연한 고용이 오히려 기회를 늘린다는 걸 알았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못 돌아가겠어요."
개혁 실패의 누적 효과
엘 코므리 법의 좌절은
프랑스 개혁 정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필요한 개혁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막혀 실행하지 못하는 구조.
이런 실패가 반복되면서
프랑스는 점점 더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의 교훈
때로는 개혁의 수혜자들조차 개혁을 반대한다.
단기적 불편함을 두려워하며
장기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다.
엘 코므리 법의 좌절이 보여준 것은,
구조 개혁에는 설득과 타협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정책의 합리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해관계자들의 신뢰를 얻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먼저다.
진정한 리더십은 이런 저항을 뚫고 나갈 용기와
동시에 반대자들과 대화하는 겸손함에서 나온다.
한국도 노동 개혁, 연금 개혁, 교육 개혁 등
구조적 과제들을 안고 있다.
프랑스의 실패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급진적 돌파보다는 점진적 합의가,
관철보다는 설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화 예고
13화에서는 42개 연금제도의 미로 – 통합할 수 없는 기득권들의 성역을 다룹니다.
프랑스에 존재하는 42개의 서로 다른 연금제도가
어떻게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왜 모든 통합 시도가 실패하는지 그 구조적 원인을 파헤칩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프랑스가 선택한 잘못된 길
2부 2화. 왜 거리의 저항은 개혁을 막았나 – 노동법 개혁이 좌절된 구조적 이유
(이 글은 프랑스 노동부 개혁안 문서, OECD 노동시장 보고서, 프랑스 노조 성명서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