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더가 잃은 것, 프랑스가 얻지 못한 것
24화. 프랑스에겐 없는 것 - 정치적 자살을 감수하는 용기
― 슈뢰더가 잃은 것, 프랑스가 얻지 못한 것
프랑스 대통령 임기는 5년이다.
재선까지 하면 10년을 할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 10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최저임금 12% 인상, 퇴직연령 인하.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주 39시간제 도입, 부자세 도입.
시라크(Jacques Chirac): 어떤 개혁도 시도하지 못하고 파업에 굴복.
사르코지(Nicolas Sarkozy): 연금 개혁을 시도했다가 뒷걸음치기.
올랑드(François Hollande): 부자세 75%를 도입했다가 폐지.
마크롱(Emmanuel Macron): 연금 개혁을 추진했다가 거리에서 멈춤.
공통점이 있다.
개혁을 시도하면 인기가 떨어진다.
인기가 떨어지면 후퇴한다.
아무도 정치적 자살을 감수하지 않는다.
70년간 반복된 패턴이다.
2003년 독일, 슈뢰더의 선택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는 달랐다.
2003년 3월 14일, 의회 연설대에 섰다.
"아젠다 2010(Agenda 2010)"을 발표했다.
독일의 운명을 걸고 노동시장 대개혁을 선언한 것이다.
독일 실업률은 11.7%에 달했다.
통일의 후유증으로 만성적 고실업 국가로 전락했다.
슈뢰더는 하르츠 개혁(Hartz Reform)으로
노동시장을 근본부터 뜯어고치겠다고 선언했다.
실업급여를 줄이고, 해고를 쉽게 만들겠다고 했다.
사회민주당(SPD) 당수가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조를 적으로 돌리는 개혁이었다.
정치적 자살 행위였다.
슈뢰더는 알고 있었다.
"이 개혁으로 나는 선거에서 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슈뢰더가 본 것
슈뢰더는 미래를 봤다.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독일은 몰락한다.
실업률은 더 오르고, 복지는 파탄 난다.
청년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다.
그의 신념은 명확했다.
"내가 선거에서 지더라도 독일은 살아야 한다."
그는 국가를 선택했다.
자신의 정치 생명 대신에.
단기 인기가 아니라 장기 국익을 택한 것이다.
개혁안이 발표되자 거리가 불탔다.
2004년 여름,
전국에서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가 벌어졌다.
"하르츠 IV를 철회하라!"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독일 통일 이후 최대 규모의 저항이었다.
슈뢰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반복했다.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2005년, 예정된 패배
2005년 9월 총선.
슈뢰더의 사회민주당이 패배했다.
전통 지지층인 노동자들이 등을 돌렸다.
"우리를 배신했다!"고 외쳤다.
예견된 결과였다.
슈뢰더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57세, 정치 인생의 정점에서 극적으로 추락했다.
하르츠 개혁의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퇴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독일을 위해 옳은 일을 했습니다.
역사가 판단할 것입니다."
정치적 패배를 감수하고도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역사는 실제로 판단했다.
10년 후, 독일의 기적
2015년.
독일 실업률은 4.6%로 하락했다.
유럽 최저 수준이었다.
슈뢰더가 물러날 때보다 절반 이하로 급감한 것이다.
하르츠 개혁은 사실상 독일 경제를 구했다.
안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연설했다.
"오늘의 독일 경제 성과는 슈뢰더 전 총리의 용기 덕분입니다."
정치적 적이었던 보수 정당 여성 총리가
진보 정당 남성 전임자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슈뢰더는 TV로 그 연설을 봤다.
이미 정치인이 아니었다.
LNG 기업 고문으로 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보십니까. 나는 옳았습니다."
10년을 기다린 뒤에야 받은 보상이었다.
2025년 파리, 마크롱의 선택
2025년 프랑스.
마크롱이 또다시 노동 개혁을 시도한다.
하지만 거리에는 벌써 시위대가 모인다.
"개혁 철회!"
익숙한 패턴이 다시 시작된다.
마크롱의 지지율은 23%다.
더 떨어지면 레임덕이다.
측근들이 속삭인다.
"대통령님, 물러서십시오. 다음을 기약합시다."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에게는 속삭임이 달콤하다.
마크롱은 고민한다.
슈뢰더처럼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시라크처럼 후퇴할 것인가?
20년 전 독일과 같은 기로에 선 프랑스이지만, 선택은 여전히 동일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프랑스는 다시 후퇴할 것이다.
프랑스에 없는 것
프랑스에는 슈뢰더가 없다.
정치적 자살을 감수하는 정치인이 없다.
드골(Charles de Gaulle) 이후,
70년간 어떤 대통령도 인기를 버리고 개혁을 밀어붙인 적이 없다.
시라크는 1995년 파업에 굴복했다.
사르코지는 2010년 거리 압력에 후퇴했다.
올랑드는 아예 개혁을 포기했다.
마크롱은 2023년 연금 개혁을 절반만 관철했다.
70년간 반복된 패배의 역사다.
왜 그럴까?
첫째, 5년 단임제 문화다.
대통령들은 재선을 노린다.
인기를 잃으면 재선이 불가능하다.
슈뢰더처럼 정치 생명을 바칠 각오가 없다.
둘째, 프랑스 국민의 저항 문화다.
1789년 대혁명 이후 거리 투쟁이 DNA에 새겨졌다.
조금만 불만이 생겨도 거리로 쏟아진다.
독일처럼 "고통을 감내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지 않는다.
셋째, 위기 인식의 결정적 차이다.
독일은 2003년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프랑스는 2025년에도 "아직 버틸 만하다"고 생각한다.
GDP 113% 부채에도 위기감이 없다.
온수 속의 개구리가 된 것이다.
정치적 자살의 대가
슈뢰더는 정치적으로 죽었다.
하지만 독일은 살았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죽어가고 있다.
극명한 대비다.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일까?
인기를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를 지키는 것인가?
슈뢰더는 선택했다.
자신의 정치 생명 대신 독일의 미래를 택한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날 독일은 유럽 최강국이 되었다.
프랑스는 언제까지 선택을 미룰 것인가?
슈뢰더 같은 지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프랑스는 계속 추락할 것이다.
정치적 용기없이는 국가 개혁도 없다.
오늘의 교훈
진정한 개혁에는
정치적 자살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슈뢰더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희생했지만
독일 경제를 살렸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인기를 지키지만
나라는 추락하고 있다.
리더십의 본질은 인기가 아니라 책임이다.
슈뢰더는 책임을 선택했고,
프랑스 대통령들은 인기를 선택했다.
20년 후 결과는 극명하다.
다음 화 예고
그렇다면 프랑스 노동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까?
3,200페이지 괴물 법전을 어떻게 수술할 것인가?
다음 화에서는 독일, 덴마크, 스웨덴의 교훈을 바탕으로,
프랑스 현실에 맞는 실용적 개혁안을 제시해봅니다.
[프랑스 : 복지국가는 죽지 않는다]
해법과 재건
3부 3화. 프랑스에겐 없는 것 - 정치적 자살을 감수하는 용기
(이 글은 독일 연방공화국 재무부(German Federal Ministry of Finance) 하르츠 개혁 보고서 2003-2005, 스웨덴 행정부(Swedish Institute) 독일 노동개혁 비교연구 2015, OECD Economic Surveys: Germany 2023-2024, 독일 연방고용청(Bundesagentur für Arbeit) 실업통계 2003-2015, 독일 하르츠위원회(Hartz Commission) 최종 보고서 2002, Friedrich-Ebert-Stiftung 하르츠 개혁 평가 연구 2010-2015, Gerhard Schröder 회고록 'Entscheidungen' (2006), Angela Merkel 연설문 2015, 한국노동연구원 독일 노동시장 개혁 연구 2022, 한국경제연구원 하르츠 개혁 시사점 2020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