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핑크의 편지 한 통이 전 세계 CEO를 움직이는 이유
24화. 블랙록은 왜 14조 달러를 움직이는가
― 래리 핑크의 편지 한 통이 전 세계 CEO를 움직이는 이유
2025년 3월 31일 월요일 오전, 뉴욕 맨해튼.
전 세계 수천 명의 CEO들이 같은 날 같은 발표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제목은 The Democratization of Investing(투자의 민주화).
이 편지는 광고가 아니다. 명령도 아니다. 하지만 읽는 순간 CEO들은 안다.
이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 회사 주가가 흔들린다.
2025년 편지의 핵심 메시지는 '사모시장(Private Markets)을 모두에게 열라' 였다. 핑크는 썼다.
“투자자들은 공공시장과 사모시장을 원활하게 통합한 포트폴리오를 원합니다. 데이터와 리스크 관리, 기술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리고 2026년 2월 17일, 가장 최근의 서한에서는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미국인들은 은퇴를 위해 충분히 저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의 아무도 필요한 것에 가깝지 않습니다.”
래리 핑크는 대통령이 아니다. 법을 만들 권한도 없다. 하지만 그가 편지 한 통으로 전 세계 기업 경영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블랙록이 그 기업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블랙록의 운용 자산 규모는 2025년 말 기준 14조 달러를 돌파했다. 2025년 연간 순유입액만 6,980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 숫자가 얼마나 큰지 비교해보자.
한국 GDP는 약 2조 2,000억 달러다. 블랙록은 한국 경제 6배 이상 규모의 돈을 움직인다. 전 세계 GDP 100조 달러의 14%다. 프랑스 GDP 3조 달러, 영국 GDP 3조 3,000억 달러를 합친 것보다도 크다.
더 놀라운 것은 성장 속도다. 1988년 창립 당시 블랙록은 블랙스톤(Blackstone)으로부터 받은 500만 달러 신용한도로 출발했다. 37년 만에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1조 3,000억 달러였는데, 17년 만에 10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 돈은 어디서 왔을까? 전 세계 연기금, 국부펀드, 보험사, 대학 기금, 그리고 개인 투자자들이다. 한국 국민연금도 블랙록에 수십억 달러를 맡기고 있다. 당신이 가입한 퇴직연금 계좌에도 블랙록 ETF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블랙록을 이해하려면 창립자 래리 핑크를 알아야 한다. 1952년생인 그는 UCLA에서 정치학(BA)을 전공하고, 이후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에서 부동산 MBA를 취득한 후 1976년 퍼스트 보스턴(First Boston)에 입사했다. 모기지 담보증권(MBS) 시장의 선구자로 빠르게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1986년,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터졌다. 금리 예측을 잘못해 회사에 1억 달러 손실을 입혔다. 하루아침에 실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실패에서 그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리스크를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면,
절대 이런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1988년 그는 동료 7명과 함께 총 8인의 공동창업자로 블랙록을 창립했다. 처음에는 블랙스톤(Blackstone)의 산하 조직인 블랙스톤 파이낸셜 매니지먼트로 출발했으며, 블랙스톤이 50% 지분을 받는 대신 500만 달러의 신용한도를 제공했다. 초기 사무실은 뉴욕 맨해튼의 작은 원룸 하나였지만, 핑크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리스크 관리 기술로 세계 금융을 지배한다.”
불과 4년 만에 170억 달러의 운용 자산을 달성했고, 1999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했을 때는 이미 1,650억 달러 규모의 자산운용사가 되어 있었다.
블랙록은 엘리엇처럼 시끄럽게 공격하지 않는다. 조용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모든 회사의 주식을 조금씩 산다.
애플 주식의 블랙록 지분은 약 7.86%에 달한다(2025년 12월 기준). 마이크로소프트는 약 8.11%. 아마존도, 구글도, 테슬라도, 엑슨모빌도, JP모건도 블랙록이 최상위 주주에 속한다. S&P 500 기업 중 블랙록이 5대 주주에 들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다. 다만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최대주주는 뱅가드(Vanguard)이며, 블랙록은 두 종목 모두에서 2위 대주주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POSCO, 네이버, 카카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주요 주주 명단에는 항상 블랙록이 있다.
국민연금도 블랙록 ETF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당신의 퇴직연금 계좌에도 블랙록 상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블랙록의 고객이자 블랙록이 지배하는 기업의 간접 주주가 되어 있다.
블랙록의 전략은 인덱스 투자다. S&P 500 지수를 추종하는 ETF를 만들어 팔면, 자동으로 500개 기업 전부의 주주가 된다. 개별 기업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시장 전체를 산다.
이 전략의 무서운 점은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주가가 오르면 팔고 나간다. 하지만 블랙록은 인덱스 펀드이므로 팔 수 없다. 영구 주주다. CEO 입장에서는 블랙록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언제든 의결권을 행사해 이사를 교체하거나 경영 방침에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보편적 소유(Universal Ownership)라고 부른다. 특정 산업이나 기업이 아니라 시장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블랙록은 기업 간 과도한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코카콜라와 펩시가 마케팅 비용을 쏟아부으며 싸우는 것보다, 둘 다 적당히 이익을 내는 게 블랙록에게는 유리하다. 둘 다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블랙록의 진짜 무기는 자산 규모가 아니라 알라딘(Aladdin)이다. Asset, Liability, Debt and Derivative Investment Network의 약자다. 이 시스템은 1988년 블랙록 창립과 동시에 개발되기 시작해, 전 세계 모든 자산의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2000년 블랙록은 자체 플랫폼을 외부에 개방해 블랙록 솔루션즈(BlackRock Solutions)라는 사업 부문을 출범시켰다. 블랙록뿐 아니라 경쟁사들도, 연기금도, 보험사도, 심지어 일부 중앙은행(이스라엘 중앙은행 등)들도 알라딘을 쓴다. 알라딘이 2013년에 관리한 자산은 약 11조 달러였으며, 2020년 기준 21조 6,000억 달러에 달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했다. 블랙록 자체 운용 자산을 훨씬 초과하는 규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 세계 금융 자산의 상당 부분이 알라딘이라는 단 하나의 시스템 위에서 돌아간다는 뜻이다. 만약 알라딘이 멈추면 세계 금융 시스템이 흔들린다. 그래서 알라딘은 금융의 안드로이드 OS라고 불린다.
래리 핑크의 연례 서한은 2012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조용히 포트폴리오 기업 CEO들에게만 보냈지만, 이제는 전 세계 수천 명의 CEO에게 보내고 동시에 대중에게도 공개한다.
2018년 서한의 주제는 A Sense of Purpose(장기적 목적)였다. 핑크는 썼다.
“기업은 단기 실적이 아니라 장기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분기별 실적 가이던스를 중단하십시오.”
그해부터 수십 개 기업이 분기 가이던스를 폐지했다.
2020년 서한의 주제는 기후 변화였다.
“기후 리스크는 투자 리스크입니다.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습니다.”
그 후 ESG 투자 열풍이 불었다. 기업들은 앞다퉈 탄소중립 목표를 발표했다.
2022년 서한 The Power of Capitalism(자본주의의 힘)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전면 방어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정치적 의제가 아닙니다. '깨어있음(woke)'이 아닙니다. 주주뿐 아니라 직원, 고객, 지역사회 모두를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장기 수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2023~2024년 들어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국 공화당 주지사들이 블랙록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며 공격했다. 텍사스, 플로리다 같은 주들이 블랙록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핑크는 한 발 물러섰다. 2024년, 2025년 서한에서는 ESG, 기후변화, DEI라는 단어가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
2025년 3월 31일 발행된 서한의 제목은 투자의 민주화(The Democratization of Investing)였다. 사모시장 확대, 에너지 인프라 투자 필요성, 은퇴 저축 위기, 토큰화(tokenization)가 핵심 주제였다. AI는 데이터 분석 기술의 맥락에서 언급되었지만, 서한의 주요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2026년 2월 17일, 가장 최근의 서한에서 핑크는 미국의 은퇴 위기를 정면으로 경고했다.
“편안하게 은퇴하려면 약 210만 달러가 필요하지만, 우리가 조사한 사람들 중 62%는 15만 달러 미만을 저축했습니다. 거의 아무도 필요한 수준에 가깝지 않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의 CEO가 자국민의 노후 파탄을 공개 경고한 것이다.
블랙록은 위기 때마다 더 커졌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 정부는 베어스턴스와 AIG의 부실 자산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복잡한 파생상품을 몰랐다. 연방준비은행(뉴욕 Fed)과 재무부는 블랙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것 좀 분석해주게.”
블랙록은 알라딘을 돌려 베어스턴스, AIG, 씨티그룹, 패니매의 부실 자산을 평가하고 처리를 자문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정부의 자문사가 된 것이다.
2020년 코로나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Fed는 회사채를 사들여 시장을 안정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Fed는 회사채를 사본 적이 없었다. Fed는 블랙록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대신 회사채 좀 사주게.”
블랙록은 Fed의 돈으로 회사채 ETF를 샀다. 물론 자사 iShares ETF도 매입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에 대해 WSJ 등 주요 언론은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 문제를 제기했다. 심판(정부)이 선수(블랙록)에게 경기 운영을 맡긴 꼴이다. 이 유착 관계 덕분에 블랙록은 정부의 그림자(Shadow Government)라고 불린다. 민간 기업이 사실상 중앙은행의 정책 집행을 대행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다.
블랙록만 큰 게 아니다. 자산운용업계는 빅3가 지배한다. 블랙록 14조 달러, 뱅가드 약 9~12조 달러, 스테이트스트리트 약 4조 7,000억~5조 달러. 합치면 미국 GDP(28조 달러)와 맞먹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셋이 서로 주주라는 점이다. 이들은 경쟁하면서도 협력한다. 같은 기업의 주주총회에서 같은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조가 만드는 문제를 공통 소유(Common Ownership)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항공업계를 보자. 델타항공, 아메리칸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의 최대주주가 모두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스트리트다. 그러면 이 항공사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유인이 줄어든다. 차라리 셋 다 가격을 비슷하게 유지하는 게 블랙록에게는 유리하다. 둘 다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블랙록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POSCO, 네이버, 카카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주요 주주 명단에는 항상 블랙록이 있다.
국민연금도 블랙록 ETF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당신의 퇴직연금 계좌에도 블랙록 상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블랙록의 고객이자 블랙록이 지배하는 기업의 간접 주주가 되어 있다.
블랙록은 2008년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현재 서울 사무소는 강남이 아닌 종로구 그랑서울타워(Gran Seoul Tower, 종로구 종로 33)에 위치하며, 최근 사업 확장을 위해 기존 대비 약 두 배 규모의 공간으로 이전했다.
2025년 9월에는 한국 정부와 블랙록이 전략적 파트너십을 공식 체결해 한국을 아시아 AI 허브로 육성하기 위한 협력을 본격화했다. 삼성전자가 RE100(재생에너지 100%)을 선언하고,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배경에는 블랙록의 입김이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제 래리 핑크의 연례 서한을 받는다.
“블랙록은 소유하지 않고 지배한다.”
블랙록은 기업을 100% 인수하지 않는다. 5~8%만 보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주총회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이사 선임에 영향을 미치고, 경영 방침에 의견을 낸다.
래리 핑크의 편지 한 통이 전 세계 CEO를 움직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그들의 주주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주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주인이다. 14조 달러라는 압도적 규모가 그를 세계 금융의 설계자로 만들었다.
21화에서 본 것처럼 제조업이 죽고 금융이 살아남았고, 22화에서 본 것처럼 골드만삭스가 정부를 장악했고, 23화에서 본 것처럼 엘리엇이 개별 기업을 공격했다면, 24화에서 본 블랙록은 조용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자본주의 전체를 재편하고 있다.
블랙록은 세상을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지수를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그게 곧 세상이 되었다.
블랙록이 14조 달러로 조용히 지배한다면, 또 다른 세력은 0.001초의 속도로 시장을 지배한다.
개인투자자는 0.001초 뒤에 출발한다.
당신이 매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미 수천 건의 거래가 당신보다 먼저 체결되었다. 초고빈도 거래(HFT)는 빛의 속도로 돈을 번다. 광케이블 1미터 단축을 위해 수억 달러를 쓴다.
25화에서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속도로 작동하는 알고리즘 거래의 세계와, 그 속에서 개인투자자가 구조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헤칩니다.
[달러 제국: 파월이 세계를 움직이는 방법]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주의
3부 4화 (시리즈 24화). 블랙록은 왜 14조 달러를 움직이는가
(이 글은 BlackRock Annual Report 2025 및 Q4 2025 실적 발표, Larry Fink Annual Chairman’s Letter to Investors 2018~2026, BlackRock Aladdin 공식 자료, Bloomberg “BlackRock’s Influence” 특집 보도, Financial Times “The Big Three” 시리즈, 뉴욕 연방준비은행 “BlackRock as Fiscal Agent” 계약 문서, WSJ “Fed Hires BlackRock to Help Calm Markets” 2020년 보도, Forbes “How BlackRock Abandoned Social And Environmental Engagement” 2024년, Yahoo Finance AAPL·MSFT 주요 주주 현황 2025년 12월 기준, 한국예탁결제원 외국인 주요 주주 현황, Korea Times “Korea, BlackRock forge partnership to build Asia’s AI hub” 2025년 9월, Asia Asset Management “BlackRock exits mutual fund business in Korea”, Jan Fichtner et al. “Hidden Power of the Big Three” 학술논문, Reuters “BlackRock’s assets hit record $14 trillion” 2026년 1월 보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