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잔향-배드민턴 이후 몇년
밤공기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낮의 햇빛이 식지 못한 채,
건물 벽을 따라 천천히 증발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번지는 골목,
우리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다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그 밤의 의미였다.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기억나? 그날 운동장.”
나는 고개를 들었다.
“기억나. 네가 나를 이겼던 날.”
그녀가 웃었다.
“졌잖아. 그런데 그날,
네 표정이 참 이상했어.”
“이상했어?”
“마치… 이기고도 미안한 사람처럼.”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나방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자
그 그림자도 함께 떨렸다.
“그땐 몰랐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은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한 연습이었던 것 같아.”
“어떤 말?”
그녀가 내 쪽을 바라봤다.
“잘 지냈냐고 묻는 말.”
나는 작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봐.”
“응.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정말 아무렇지 않아질까 봐 무서워서.”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향이 잠시 내 코끝을 스치고 사라졌다.
그 짧은 냄새 속에
수많은 여름이 숨어 있는 듯했다.
매미 소리, 땀에 젖은 손,
햇빛 아래서의 미소와 다툼.
모든 게 순간적으로 되살아났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아직 내 몸 어딘가에 남은 감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날, 왜 울었어?”
그녀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
“기억이 다르네. 울었던 건 너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 네 눈이 먼저 젖었어.”
“그랬을지도.
그땐 네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무엇이 내 눈물이고,
무엇이 땀인지 구분이 안 됐어.”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공기 속엔 여름의 냄새와
지나간 사랑의 잔열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때 키스 기억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순간의 공기,
서로의 숨결이 맞닿던 거리.
불빛이 흔들리고,
시간이 멈춘 듯 느려졌던 그 밤.
그건 단순한 키스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라는 걸 느꼈어.”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자각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던 순간,
우리는 세상 속의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지금, 서로의 온도 속에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젠 그때처럼 숨이 막히진 않네.”
“나도.”
“근데 이상하지?
그날 이후로, 여름만 오면
늘 네가 떠올라.”
“나도 그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너머로 희미한 별이 깜빡였다.
도시의 여름은 여전히 뜨겁고,
그 열기 속에서
우리가 나눈 숨결이 아직도 떠도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이젠 괜찮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내 안의 공기는 조금씩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 차가움조차
어쩐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손끝에 아직 남은 온도가
내 존재를 증명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밤하늘은 점점 더 짙어졌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