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착시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은
자신의 감정이 극점에 도달한 순간,
그 정점의 행복이 오래도록 머물 것이라고 믿는다.
심장이 크게 울릴 때면
그 울림이 멈추지 않을 것 같고,
그 울림이 희미해질 때조차
그 감각만은 깊은 어딘가에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의 결을 받아내는 신경은 서서히 무뎌지고,
심장의 떨림도 더 이상 청춘의 박동처럼
날카롭게 울리지 않는다.
감정은 약해지고,
감각은 흐려지고,
결국 잔향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만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한다.
마치 영원의 창가에 서 있는 사람처럼
세상의 변화를 자신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착시다.
하지만 삶은 영원이 아니다.
밤이 지나고 나면
불 꺼진 책상이 자리를 지키고,
바람이 스며드는 창문이 열려 있으며,
돌바닥 위에는
어젯밤 깨진 유리잔이 조용히 누워 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목소리도 없고,
그저 사라지는 사물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닳아버린 옷처럼
인간의 사고도 그렇게 닳아간다.
생각의 결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 흐트러지고,
확신은 쉽게 흔들리며,
신념조차 계절처럼 갈아입는다.
흩어지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존재의 본래적 속성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플라톤이 말한 그림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실체라고 믿지만
빛의 방향이 달라지면
형태도, 크기도, 의미도 바뀌고
결국 남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흔적뿐이다.
그림자든, 투명함이든 보이는 방식이 다를 뿐
둘 다 ‘붙잡을 수 없는 존재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우리는 실체라 말하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투명한 방식으로 존재해온 건지도 모른다.
손으로 잡히지 않고,
이름으로 규정되지 않고,
흐르는 듯하면서도
흩어지기도 하는 존재로.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지 않다고 믿고 싶어한다.
너무 투명해지면
이기심도 사랑도 욕망도 두려움도
모두 들켜버릴 것 같아서.
투명함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잔혹하다.
서로의 진실을 보게 하고,
서로에게 기대게 하고,
심지어 서로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니까.
그래서 인간은
투명하지 않은 척하며 살아간다.
빛을 반사하는 표면을 만들고,
두께가 있는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실체’로 포장한다.
투명함을 두려워해
불투명함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투명한 척한다고 해서
투명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투명한 존재다.
단지 그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 뿐이다.
투명함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영원을 착각하지 않게 된다.
영원을 붙들기 위해 애쓰기보다
순간의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영원을 바라보던 눈이
투명함을 직시하는 눈으로 바뀌는 순간
그제야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가장 아름다운 결로 이해하게 된다.
사라지면서도 남아 있는 것,
흐르면서도 흔적으로 남는 것,
그 모든 것이
우리 존재의 투명한 불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