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관계-일상적인 그릇, 일상적인 나
책상 위에 그릇 하나가 놓여 있다.
아침 햇빛이 창을 비껴 들어오면서
그릇의 안쪽에 조용한 빛의 웅덩이가 만들어진다.
손목으로 그 그릇을 살짝 밀어보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낮고 둔하게 울린다.
유약이 고르게 바르지 못한 자리가
빛을 받으며 조금 더 흐리게 번진다.
나는 그 불균질한 표면이 좋다.
흠과 결이 손끝에 닿으면
매끄럽지 않은 감촉이 느껴지고
그 순간, 그릇이 지나온 시간이
말 없이 피부로 전해진다.
그릇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쪽 벽면에 아주 얇게 생긴 긁힘도 보인다.
처음에는 보기 싫었지만
지금은 그 긁힘이
그릇을 ‘사용된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버텨낸 사물’로 보이게 한다.
나는 그릇 속으로 손바닥을 살짝 가라앉혀 본다.
그 안쪽은 생각보다 깊고
비어 있는데도 가득 찬 느낌이 있다.
모양이 그저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맞이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비워져 있는 것이다.
그릇을 회전시키면
빛의 모양도 따라 회전한다.
그 빛이 벽에 반사되었다가
다시 그릇 안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동안
나는 문득
내 마음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번에 반응하지 않고
빛이 머무는 속도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
그릇이 보여주는 건 바로 그런 속도다.
서두르지 않고,
자기 모양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남이 담아주는 것에 따라 천천히 변하는 표정.
나는 그릇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내가 불완전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릇의 가장자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조금 불규칙한 곡선이 손끝에 닿는다.
그 곡선은 삐뚤어졌지만
왠지 자연스럽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모양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릇 하나를 오래 바라보다 보면
내 안에서 묵직했던 감정들이
그릇의 빈 공간 쪽으로 조금씩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공기가 가라앉듯,
먼지가 천천히 바닥에 누워가듯,
내 생각도 그릇의 비어 있는 중심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릇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공허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비어 있음은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릇에 물을 따르면
표면에서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그 파문은 벽을 따라 부드럽게 퍼지고
잠시 후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릇의 안쪽 남은 흔적은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떨림과 비슷하다.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는 상태.
그게 바로 내가 오래 찾던 안정의 결이었다.
내가 투명한 불완전이라는 말을 떠올린 것도
이때였다.
그릇처럼,
내 마음도 흠이 있고, 결이 있고,
어디선가는 조금씩 비틀려 있지만
그 불규칙함이 오히려 나를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투명한 불완전은
결국 ‘나의 그릇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과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상 위 그릇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그 모양이
어쩐지 나를 닮아 있다.
조금 비어 있고,
조금 흔들렸으며,
빛이 들어오면 형태가 바뀌기도 하는 존재.
그릇을 바라보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나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고
내 마음의 균열을 억지로 감추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시 살아진다.